재난에 대한 우리나라의 대응이 매뉴얼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작년 10월 29일에 있었던 이태원 참사는 국가적인 참사로서,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생존자 및 유가족들은 오히려 “왜 그곳에 갔느냐” 같은 비난을 들어야 했고, 사고 이후 여러 가지 후속 대응에서 배제된 채로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 이태원참사대책본부·보건의료특별위원회와 국회 생명안전포럼, 국회 김민석, 남인순, 진선미, 이해식, 신현영 의원의 주최로 ‘피해자 중심 재난대응 체계 마련을 위한 토론회’가 3월 28일, 국회의원회관 제5간담회의실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이정민 이태원유가족협의회 부대표가 참여했다. 이정민 부대표는 “피해자 중심 체계가 바로 잡혀서 이제는 피해자들이 헤매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왜 피해자가 그토록 힘들어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동안 피해자 권리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유가족들은 현재 진상을 요구하는 진실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고 있다”고 말했다.
진선미 의원은 “재난 대응체계가 끊임없이 발전해오고 있지만, 있는 제도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제대로 연구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날 좌장을 맡은 송경용 생명안전시민넷 상임대표는 “피해자 중심주의는 너무나 상식적인 일임에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국가에서 피해자는 행정 처리의 대상이 된다. 누구보다 상황을 잘 아는 피해자들이 배제가 된다. 왜 피해자가 눈치를 봐야하고, 권리를 요구하면 떼를 쓰는 것처럼 되는지 안타깝다. 상식을 회복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첫 번째로 국립재난안전연구원 권진아 연구원이 ‘대규모 사회재난 시 피해자 지원체계 개선방안’에 대해 발제했다. 작년 3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연구는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했던 자치단체를 찾아가 의견을 청취하고, 필요한 지원 프로세스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권진아 연구원은 “재난 대응은 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중앙부처와 자치단체의 기능 및 권한을 조정해 협업이 이뤄져야 한다. 재난수습 시점별, 피해자 유형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위기관리 매뉴얼, 지침 등에 세부절차를 보강해야 한다”며 세부 예시를 제시했다.
두 번째로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피해자 권리위원회 박성현 활동가가 ‘이태원 참사로 돌아본 피해자 중심주의 필요성’에 대해 발제했다. 발제에 앞서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에 대한 묵념이 진행됐다.
박성현 활동가는 “참사 피해자들에게 심리상담 전화번호가 주어졌지만 전화상담으로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이 과연 자발적이고 적정한 방식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유가족들은 유품을 전달받고, 일괄적으로 기록된 사망 시각을 전달받는 과정에서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박성현 활동가는 “이해관계자라는 이유로 피해자 참여가 배제되고 있다. 피해자들이 겪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과 애도하고 추모하는 일은 함께 가야할 두 개의 바퀴와 같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고,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모두의 안전을 위한 길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행정안전부 이일령 안전시스템개편지원팀장, 소방청 하지환 구급자원계장, 경찰청 조대희 과학수사운영계장,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양경무 법의학부장, 보건복지부 박문수 노인지원과장, 보건복지부 이성규 재난의료과 사무관, 법무법인 법과치유 오지원 변호사, 신현영 국회의원이 참여했다.
이날 현장에 많은 정부 부처 담당자들이 참석했다. 행정안전부는 재난예방 및 후속 관리 전략을, 소방청은 현장 응급의료진 간 소통관리 전략을, 경찰청은 신원확인 관리 대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국립과학수사원 양경무 법의학부장은 “문제는 희생자를 시신으로 볼 것이냐, 조금 전까지 살아있던 사랑하는 가족으로 볼 것이냐의 차이다. 특별한 체계 없이 시신을 인도했고, 의학적인 설명이나 유류품에 대한 정중한 포장과 인도 과정이 없었고, 유족의 질문에 대해 답해주는 이가 없었다. 그 부분이 유가족들이 많은 것들을 호소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양경무 부장은 경찰청이 운영하는 K-DVI(한국 신원확인 시스템)을 지방청에서도 따르도록 하고, 효율성 측면에서 임시영안실 설치를 경찰이 주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서울청 주도로 시신이 한 곳에 모이지 않고 신속한 시신 인계가 진행됐지만, 그 과정에서 위와 같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또 대량재해 현장 검안 시 검안이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부분을 지적했다. 겉모습만 보고 사망시각을 적어야 하고, 과거 이력을 전혀 알 수 없는 채로 공란을 둬야 하는 부분에서 유가족들의 분노가 발생한다며, 긴급 시기에만이라도 희생자의 과거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의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 이후 신설된 보건복지부 재난의료과에서도 토론에 참여했다. 이성규 사무관은 “현장응급소장(보건소장)의 역량을 강화하고 유관기관의 협력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국 보건소장 대상 교육을 상반기 중으로 완료하고, 합동훈련을 연 2회 이상으로 정례화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의사 출신 보건소장이 40%라는 점에서, “보건소장의 판단에 따라 DMAT에 현장지휘권을 인계할 수 있도록 하고, DMAT의 법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근본적인 제도 개선의 필요성도 제시됐다. 오지원 변호사는 “각 부처에서 최선을 다해도 연계가 안되기 때문에 대응에 한계가 있고, 답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규정이 미흡해 공무원들도 피해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추상적인 국가안전기본관리계획이 아닌 실질적인 피해자 대응을 위한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이 필요하다. 국내 참사 피해자들이 해외 사례를 조사해 직접 입법에 참여한 내용으로, 5월에 범국민운동본부가 출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신현영 의원은 “부처별로 계속 간담회를 하면서 얼마나 달성했는지 끝까지 책임지며 소통했으면 한다. 피해자 중심 시각에서 유가족과의 소통, 참여가 강화돼야 한다. 사건 발생 후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프랑스 유가족협의회 ‘FENBAC’의 사례를 참고해달라”고 말했다.
또한 “대형참사 이후 검시체계 시스템의 선진화가 필요하다. 이번 참사 현장에 국과수가 투입되지 않아 희생자들의 구체적인 사인을 알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법의학자의 수가 너무 적어 모든 사건을 건마다 대응하기에 어려움이 있는데, 1~2년 간의 교육을 받고 검시체계에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했으면 한다. 호흡부전도 똑같은 호흡부전이 아니다. 내실있는 시체검안서가 작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의료비, 간병비 지원체계의 개선이 필요하다. 1월 31일 기준 사상자 본인 및 가족에게 총 1억 3천만원이 지원됐으며, 신청절차가 까다롭다. 찾아가는 주치의 제도와 같은 피해자 중심의 선진 재난 대응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신현영 의원은 “DMAT의 법제화가 필요하다. 민간으로서 현장에서 사고 수습을 지원해도 보호받을 법적인 제도가 없다. 소방 등 구호활동 참여자에 대한 심리안정휴가를 보장하고, 충분한 휴식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토론에 끝까지 참석한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부대표는 소감으로 “굉장히 답답했다. 문제를 고치기 위한 토론이라기보다는 알고 있는 부분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참사 때마다 항상 재발 방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꼭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정부가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적극적으로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것을 잘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피해자가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송경용 좌장은 토론회를 마무리하며 “유족들로부터 오랜 어둠 속에서 겨우 빛으로 나왔는데, 떠도는 말에 상처를 받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들었다.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명은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의 문제다. 현재 우리가 닥친 문제에 대해 성심을 다해서 해결하는 데 힘을 합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