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에서 ‘중대한 과실이 있는 의료행위’의 정의를 규정하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는 의료사고로 인한 환자 피해를 보다 신속하고 공정하게 구제하고, 의료인의 과도한 형사적 부담을 완화해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조성하고자 하는 입법 취지에 깊이 공감합니다.
환자 보호와 안전한 의료체계의 확립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지향해야 할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최근 소아청소년과 진료와 관련한 일부 판결에서 소아진료의 특수성과 의료행위의 불확실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 개정안에 포함된 ‘중대한 과실’의 정의마저 의료현장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경우 소아 필수의료의 위축이 더욱 심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학회는 깊은 우려를 표합니다.
특히 이번 개정안에 포함된 일부 문언은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모호해, 무엇이 ‘중대한 과실’에 해당하는지 명확하게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환자나 수술 부위를 혼동해 수술한 경우, 수술 후 체내에 이물질을 남긴 경우, 혈액형이 맞지 않는 수혈을 한 경우처럼 객관적으로 명백한 잘못은 중대한 과실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 필요한 진단이나 치료를 하지 않은 경우 또는 ▲통상적인 진료 수준에서 현저히 벗어난 경우와 같은 표현은 해석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습니다. 의료현장에서는 환자의 상태, 질환의 특성, 의료기관의 여건, 당시 확보 가능한 정보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소아진료에서 더욱 크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소아 환자는 성인과 달리 자신의 증상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진료 과정에서도 보호자의 설명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가벼워 보이던 증상도 짧은 시간 안에 급격히 악화될 수 있습니다. 검사와 처치 역시 아이의 협조 정도와 신체적 부담을 함께 고려해야 하므로, 성인과 같은 방식으로 곧바로 확정진단에 이르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채 추상적인 기준을 일률적으로 적용한다면, 소아진료의 특수성과 임상적 판단의 어려움은 적절히 반영되기 어렵습니다.
또한 이번 개정안은 환자에게 중대한 손상이나 사망과 같은 결과가 발생한 경우, 중대한 과실 판단이 결과 중심으로 이뤄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료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과 위험을 수반하는 영역이며, 그 적정성은 결과가 아니라 행위 당시의 의학적 기준과 임상적 맥락에 따라 평가돼야 합니다.
결과 발생 이후의 사후적 관점에서 의료행위를 재구성해 판단하게 되면, 당시 확보 가능한 정보에 기초한 합리적 판단에도 결과를 이유로 과도하게 책임이 확대될 우려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명확한 규정은 의료현장에서 방어진료를 심화시키고, 소아·응급·중환자진료와 같은 고위험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기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고위험 필수의료 분야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이 높고 경과의 변동성도 큰 영역입니다. 이러불명확한 ‘중대한 과실’ 정의 조항의 재검토를 촉구합니다.
한 분야에서 법적 위험이 과도하게 확대될 경우, 의료인은 적극적 진료보다 법적 분쟁의 회피를 우선하게 될 수 있으며, 이는 환자의 의료접근성 저하와 적시 진료의 지연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이미 취약해진 소아 필수의료 기반을 고려할 때, 이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입니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는 환자 보호와 의료인의 안정적 진료환경이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지켜져야 할 가치라고 밝힙니다. 환자 보호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의료현장이 과도하게 위축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돼야 하며, 특히 소아와 청소년이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체계가 반드시 보장돼야 합니다.
이에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는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첫째, ‘중대한 과실’의 범위는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하고 사회적으로도 명백한 안전원칙 위반 행위를 중심으로 엄격하고 한정적으로 규정돼야 합니다.
둘째, ‘예측 가능성’, ‘통상적 진료’, ‘안전관리 의무’와 같이 해석의 여지가 큰 추상적 문언은 삭제하거나,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기준으로 정비돼야 합니다.
셋째, 중대한 과실 여부의 판단은 결과가 아니라 행위 당시의 의학적 판단 기준, 즉 동일 전문과목과 유사한 진료환경에서의 사전적 기준에 따라 이뤄져야 합니다.
넷째, 소아·응급·중환자진료 등 고위험 필수의료 분야의 특수성과 현실이 입법 과정에 반드시 반영돼야 합니다.
소아진료 현장의 위축은 결국 소아와 청소년, 그리고 그 가족의 불안과 부담으로 돌아가며,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의 소아필수의료 기반을 흔들 수 있습니다. 환자 보호와 소아 필수의료의 지속 가능성은 함께 지켜져야 할 공공의 가치입니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는 이번 개정안의 ‘중대한 과실’ 정의 조항에 대해 신중한 재검토와 함께 충분한 보완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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