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고등법원이 최근 담배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흡연의 중독성과 흡연이 폐암을 포함한 중증 질환의 주요 원인이라는 의학적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담배회사에 대한 법적 책임은 부정했다. 판결문이 스스로 인정한 사실을 끝내 외면한 셈이다.
판결문은 반복적으로 말한다. “흡연 외에도 유전, 환경, 직업력, 생활습관 등 다양한 위험요인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 기여도를 특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불확실성을 이유로, 흡연이 질병 발생에 결정적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한다. 그러나 이는 질환은 여러가지 원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는 현대 의학의 사고방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의학에서 폐암은 단일 원인 질환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위험요인이 무엇인지를 본다. 흡연은 바로 그 지위에 있다. 흡연은 폐암 발생 위험을 수 배 이상 증가시키는 가장 강력한 위험요인이다. 이 점을 부정하는 의학자는 없다.
그럼에도 법원은 “개별 환자에게서 흡연이 폐암의 직접적이고 유일한 원인임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과관계를 부정했다.
판결문은 또 다른 축으로 자기책임을 든다. 중독성을 인정하면서도 흡연자의 자기결정권을 들어 피고측의 책임을 부정한 논리다. 중독은 선택의 자유를 침식한다. ‘알고도 피웠다’는 이유로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면, 알코올 중독과 약물 의존 역시 모두 개인의 선택 문제로 치부될 것이다. 한국 등 현대 사회가 중독을 질병으로 다뤄온 이유를 법원이 스스로 부정한 셈이다.
담배의 유해성은 오랜 기간 경고 돼 왔고, 경고문구와 정보 제공이 있었으며, 흡연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는 니코틴의 중독성을 재판부가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니코틴 중독은 국제질병분류(ICD)에 등재된 질환이며, 판결문 스스로도 흡연의 해악이 사회적으로 인식돼 왔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법은 중독을 ‘의지로 통제 가능한 선택’으로 치부한다.
수차례 금연 실패를 반복하는 환자들의 현실은 이런 법적 판단과는 거리가 멀다. 니코틴은 강력한 의존성을 유발하며, 특히 청소년기 흡연은 평생 흡연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크게 높인다. 세계보건기구와 수많은 연구가 이를 반복해 확인해 왔다.
담배의 유해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점도 면책 사유가 될 수 없다. 경고 문구의 존재가 중독물질의 설계와 판매 책임을 지워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담배회사는 중독성을 강화하고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오랜 기간 제품과 마케팅을 정교하게 바꿔왔다. 이 역사적 맥락을 외면한 채 모든 부담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정의와 거리가 멀다.
담배는 중독 물질이고, 폐암의 주요 원인이다. 이는 이미 결론이 난 문제다. 이번 판결이 남긴 가장 큰 문제는 입증 책임의 비현실적 설정이다. 이번 판결에서 요구되는 인과 입증의 수준은, 사실상 달성 불가능한 수준에 가깝다. 사법부가 과학이 도달한 지점을 끝내 따라오지 못한다면, 법은 더 이상 사회적 책임을 묻는 도구가 될 수 없다.
이번 판결은 묻고 있다. 법은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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