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대에는 유난히 인기가 많은 과목이 있다. 2021년 3월 서울의대 휴먼시스템의학과 윤현배 교수가 ‘국내 최초’로 의대에 개설한 ‘성소수자 건강권과 의료’가 바로 그 주인공.
성소수자 의료를 살펴보는 수업이 시작된지 어느 덧 3년째를 맞이한 지금, 이제는 필수과정과 선택과정으로 구분이 가능하고 선택실습 시간이 있을 만큼 커리큘럼이 구축됐다.
중요한 것은 그간 ‘걸어온 길’보다 ‘나아갈 길’이 더 많이 남았다는 점이다. 윤현배 교수는 단순 교육 확대뿐만 아니라 제도 개선까지 바라보고 있다.
메디포뉴스는 보다 발전된 성소수자 의료 교육을 위해 현재 미국 시애틀 워싱턴 의과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 School of Medicine)에서 연수 중인 윤현배 교수에게 서면인터뷰를 요청했다.
Q.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휴먼시스템의학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윤현배입니다. 저는 내과학과 의학교육학을 전공하고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교육하고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Q. 국내 최초로 ‘성소수자 건강권과 의료’ 과목을 창설하시며 성소수자 친화적 의료환경을 만드는 데에 기여하고 계십니다. 성소수자 의료와 관련한 과목을 만드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우연한 계기로 제가 내과 전문의인데도 성소수자를 위한 의료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왜 아무것도 모를까’ 생각해보니 과거 학생 시절에 의과대학에서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고 또 전공의 수련을 받는 동안에도 배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20년이 지난 현재도 의과대학이나 수련 병원에서 성소수자 건강과 의료에 대한 교육과 수련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육을 하지 않는다면 20년 후에도 달라질 게 전혀 없겠죠.
20년 사이에 대한민국 의료나 의학 기술은 이제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는데요, 해외에서 의학교육을 받으셨거나 연수를 다녀오신 분들은 우리가 다른 것은 뒤떨어지는 것이 별로 없는데 선진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수자의 건강과 의료에 관한 교육이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말씀들을 하십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올해 처음으로 ‘선택과정’을 개설해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Q. 성소수자 의료와 관련한 과목, ‘왜’ 필요한가요?
국내 트랜스젠더의 의료 이용 경험에 관한 국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의사 등 의료인이 성전환과 관련된 의료적 조치에 관한 지식이 부족해서 다른 병원을 알아봐야 하는 경험이 40%, 적합한 의료적 조치를 받기 위해 의료진에게 오히려 지식을 가르쳐줘야 하는 경험이 35%로 나타났습니다.
의료진에게 차별적 대우를 받거나 모욕을 받은 적도 20%, 심지어 치료를 거부당한 적이 있는 경우가 6%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의과대학에서 성소수자 의료와 관련한 교육이 꼭 필요합니다.
Q. 성소수자 의료 관련해 현재 커리큘럼은 어떻게 구성됐나요?
현재 서울의대 성소수자 의료 교육과정은 크게 필수과정과 선택과정으로 구성돼있습니다.
2학년 1학기에 전체 학생이 듣는 1시간의 필수 수업이 있고, 2학년 2학기에는 관심 있는 학생들이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16시간 분량의 선택과목이 있습니다.
향후 진로에 성소수자 의료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4학년에는 젠더클리닉을 직접 참관할 수 있는 5주간의 선택실습이 있습니다.
Q. ‘성소수자 건강권과 의료’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요?
2학년 선택과목인 ‘성소수자 건강권과 의료’에서는 성소수자의 기본적인 개념과 역사적인 과정,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사회적 차별과 혐오를 받으면서 건강권이 어떻게 침해됐는가, 어떤 건강 불평등이 생기는가 등의 내용들을 다루고요,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살펴봅니다.
구체적으로 의학적인 면에서는 성소수자 진료를 위해서 필요한 병력청취나 신체 진찰을 배우고, 성소수자들에게 필요한 건강검진, 호르몬 치료, 수술적 치료, 이런 구체적인 내용도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주에는 성소수자 진료를 수행하고 있는 서울 은평구의 살림의원을 직접 방문해서 성소수자 친화적인 의료환경이 어떤 것인가 설명도 듣고 의원도 둘러보는 기회가 있습니다.
Q. 앞으로 교육과정에 포함시키거나 개설하고 싶으신 성소수자 의료 관련 과목이 있으신가요?
현재 모든 학생이 듣는 필수 수업은 1시간뿐인데 여전히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의사로서 갖춰야 할 지식과 능력은 수업만으로는 부족하고 실습이 함께 필요합니다.
실제로 저희 교육과정에서도 2학년 선택과목에서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모의환자 실습을 하고 있고, 4학년 선택실습에서는 젠더클리닉에 직접 참관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1시간의 필수 수업 외에도 모든 학생이 참여할 수 있는 모의환자 실습을 1-2시간 정도 추가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성소수자 건강 관련 연구나 성소수자 권익단체 활동 등 더 다양한 기회를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Q. 성소수자 의료와 관련해 교육할 때 중요하게 강조하시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가장 중요하게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학생들이 의사가 됐을 때 진료실에 언제든지 트렌스젠더, 동성애자, 양성애자 등 성소수자 분들이 찾아올 수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의사가 환자의 다른 가치관과 특성을 존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자의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Q. 예비 의사들의 교육도 중요하지만, 이미 진료현장에 있는 의사들에 대한 교육도 중요합니다. 이와 관련해 해주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아직 우리는 예비 의사들에 대한 의과대학 교육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선 의과대학 교육부터 확대해야겠습니다만, 졸업 후 전공의 (레지던트) 수련과정에도 성소수자 의료에 관한 내용이 추가돼야 합니다.
특히 성소수자들이 일차적으로 많이 찾게 되는 내과와 가정의학과, 응급의학과, 그리고 트렌스젠더 당사자들의 의료 이용이 높은 정신건강의학과, 산부인과, 비뇨의학과, 성형외과 등의 전공과는 수련과정의 개선이 시급합니다.
그 외 이미 진료현장에 있는 의사들에 대한 교육도 중요한데요, 모든 의사가 매년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보수교육에 성소수자 의료 관련 내용을 포함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Q. 어떤 의사든지 진료실에서 성소수자를 만나게 될 수 있습니다. 성소수자 환자를 진료실에서 맞이하게 될 의사가 꼭 알아야 할 점이 있나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첫째는 가정하지 말자, 둘째는 판단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내 진료실에 들어오는 환자가 모두 이성애자일 것이다, 이성 배우자와 결혼했을 것이다, 트렌스젠더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지레짐작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또한 환자의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관과 잣대로 옳다 그르다 가치판단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일단 이 두 가지만 지켜도 진료실에 찾아온 성소수자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일을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Q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성소수자 의료 교육을 확대하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제가 서울의대에서 처음 교육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에 참여하시는 선생님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저도 교육을 시작하면서 연구회에 참여하게 됐고, 선생님들과 함께 작년 8월에 국내 최초로 성소수자 의료 가이드 ‘차별없는 병원’을 출간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국제적인 트렌스젠더 진료 가이드라고 할 수 있는 WPATH 건강관리실무표준 최신판을 한글로 번역해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성소수자 의료를 확대하고 개선하는데 있어서 교육도 중요하지만 ‘제도 개선’도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로 국내에서 트렌스젠더 당사자들에게 필요한 호르몬 요법이나 수술 등이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서 많은 비용을 부담하거나 비용 때문에 아예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연구회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전문가 의견을 개진하고 제도 개선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Q. 이 밖에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현재 저는 미국 시애틀 워싱턴 의과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 School of Medicine)에 1년간 연수를 와있습니다. 제가 연수지로 워싱턴 의과대학을 정하게 된 것도 성소수자 의료 교육과 관련이 있습니다.
3년 전에 서울의대에서 처음으로 교육과정을 시작했을 때 매우 막막했기 때문에 해외 사례를 많이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미국, 캐나다, 유럽 등에서는 의과대학에서 이미 적극적으로 성소수자 의료 교육을 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워싱턴 의과대학의 사례가 눈에 띄었습니다.
워싱턴 의과대학은 성소수자 의료 교육과정 트랙(Pathway)이 추가로 있어서 이를 선택하는 학생들에게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수업, 실습, 연구, 지역사회 참여 등 다양한 교육 경험을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의대 성소수자 의료 교육과정도 워싱턴 의과대학 교육과정을 벤치마킹해 구성하고자 했습니다.
시애틀에 와서 살면서 느낀 점도 많습니다. 학교, 도서관, 공공기관, 상점 등 어느 곳에서나 무지개 깃발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깃발뿐만 아니라 학교가 성소수자 학생을 포함해서 모든 학생에게 열려있고 안전한 곳이라는 점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미국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런 점은 굉장히 인상 깊고 부러웠습니다.
마침 이번 달이 프라이드 달(Pride Month)이었는데요, 시애틀에서는 한 달 내내 다양한 행사가 곳곳에서 열렸습니다.
한 가지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워싱턴 의과대학에서도 공식적으로 후원기관으로 참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의과대학과 병원의 여러 구성원과 함께 후원 부스도 지키고 일요일 행진에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행진에는 백 명이 훨씬 넘는 워싱턴 의과대학/병원 구성들이 참여했고, 전체 행렬은 처음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행렬보다 훨씬 더 많은 인파가 길 양옆에서 환호하며 함께 축하했습니다.
제가 경험한 시애틀 프라이드 행사는 단순히 성소수자만의 축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서 서로의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하고 격려하며 축하하는 자리라고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