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에 집중돼 그간 소외됐던 논바이너리, 유너크, 인터섹스 등 다른 성소수자도 이제는 표준화∙전문화된 지침을 토대로 건강과 의료를 관리받을 수 있게 됐다.
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 WPATH가 2022년 9월 ‘트랜스젠더∙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 (Standards of Care for the Health of Transgender and Gender Diverse People, SOC)’ 제8판을 발간했다.
트랜스젠더∙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 제8판은 △제1장 용어 △제2장 전 세계적 적용 가능성 △제3장 인구 추계 △제4장 교육△제5장 성인 평가 △제6장 청소년 △제7장 아동 △제8장 논바이너리 △제9장 유너크 △제10장 인터섹스 △제11장 시설환경 △제12장 호르몬치료 △제13장 수술 및 수술 후 관리 △제14장 음성 및 의사소통 △제15장 일차의료 △제16장 생식 건강 △제17장 성 건강 △제18장 정신건강으로 구성됐다.
WPATH의 행보에 발맞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트랜스젠더∙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 제8판에 대한 번역 작업이 이뤄지면서 국내 성소수자 의료를 위한 최신 가이드가 제시됐다.
이번 제8판 번역을 위해서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 내 번역팀은 물론 외부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댔다. 특히 트랜스젠더 외 다양한 성소수자로 대상이 확대된 것은 것은 물론, 진료현장에서 만나게 될 ‘성소수자 당사자’의 의견이 반영됐다는 점은 이번 건강관리실무표준 한국어판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이다.
메디포뉴스는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 소속으로 트랜스젠더∙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 ‘한국어 번역팀’에 참여한 한림의대 강동성심병원 성형외과 LGBTQ+센터 김결희 교수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Q.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는 어떤 곳인가요?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는 성소수자 및 트랜스젠더 환자 진료를 하고 있는 정신의학과, 산부인과, 가정의학과, 의학교육 전문가, 성형외과 등 여러 병원 각 과의 다학제적 선생님들이 모여 성소수자 의료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단체입니다.
Q. 트랜스젠더∙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 제8판은 무슨 내용으로 이뤄졌나요?
이번 8판에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할지, 건강관리실무표준 제8판을 어떻게 전세계에 적용할지, 트랜스젠더 등 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들은 전세계적으로 어떻게 분포하고 있는지, 해당 가이드라인이 적용될 대상자는 누구인지 등이 포함됐습니다.
특히 이분법적인 성별 체계(남성/여성) 안에 포함되지 않는 논바이너리, 이분법적 성 체계로 볼 때 생식기관에 선천적인 변이가 있는 인터섹스, 지정성별 남성이지만 남성호르몬의 영향을 안 받고 싶어하는 유너크 등의 대상자가 포함됐습니다.
성별확정 호르몬 치료, 음성 여성화 수술 등 실질적인 진료 부분도 포함됐지만, 성소수자의 전인적인 건강관리를 위해서 1차의료, 생식 건강, 성 건강, 정신 건강 등의 분야도 다뤄졌습니다.
새로 등장한 내용 중에서는 성소수자 의료에 대한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지, 수감시설이나 비수감시설 등 시설에서 성소수자 환자를 어떻게 진료를 할지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Q. 한국어판 번역을 위해 다양한 영역에서 마음을 모아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트랜스젠더∙다양한 성별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 번역 작업은 제가 속해 있는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 계시는 선생님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7판을 번역한 번역가분이 이번 8판 번역에도 참여해 연속성을 유지하려고 했으며,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의 이승현 이사장님은 헌법학자인 만큼 법학적인 면도 감수해주셨습니다.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상담심리학 박사 과정 중인 이준우 선생님도 번역팀에 참여하는 등 여러 분야의 선생님들이 함께 번역했습니다.
Q. 번역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5개월의 온라인 번역 작업 중 9회의 전문가 감수, 3회의 커뮤니티 감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모이다 보니 일단 시간 맞추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인 만큼 단어마다 각 전문 분야에 따라 번역되는 것이 달라 이를 조율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언어는 우리의 의식을 반영한다고 하는데요, 번역 작업 중 일화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성전환 수술’도 이제는 전환시킨다는 의미가 아닌 그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성별 정체성을 확정시킨다는 의미에서 ‘성별확정수술’이라고 합니다. 이번 8판에서는 확정의 의미를 넘어서, 어떤 단어로 불러야 성소수자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을 더 존중하는 의미를 담을 수 있을지 고민해 ‘성별긍정수술’로 바꿀까 번역팀 내에서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논의를 거쳐서 결국 ‘성별확정수술’이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져야 일반 대중들에게 설명하기 쉽겠다고 결론을 내리는 등 단어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Q. 트랜스젠더∙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 7판 대비 8판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예전 7판에서는 성소수자 중 트랜스젠더에만 집중했다면, 이번 8판에서는 번역판 이름(트랜스젠더 그리고 성별 다양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에서도 나타나 있듯 그 동안 소외되고 잘 주목받지 못했던 ‘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금 더 넓은 그룹의 건강과 진료를 논의했다는 면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두 번째는 ‘탈병리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성별불일치감’을 정신의학적 질환∙질병으로 보고 병리화시켜서, 성별불일치감을 완화할 수 있는 어떠한 치료∙진료를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번 8판에서는 ‘성별불일치감’을 질병이 아닌 인간에게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으로 보고, 그들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서 전인적으로 어떤 케어를 할 것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췄습니다.
세 번째로는 수술 방법의 다양성도 굉장히 많이 존중했습니다. 예전에는 성별확정수술이라고 하면 ‘지정성별 남성→여성’, ‘지정성별 여성→남성’ 이렇게 이분법적인 카테고리로 넘어가는 이런 수술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형적인 성별확정수술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을 더 인정하며 성소수자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서, 성소수자 당사자가 원하는 젠더 표현과 성별 정체성의 현실화를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수술 방법까지 아우르고 있습니다.
마지막은 다학제적 진료입니다. 이번 8판에서는 어떤 한 과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의 건강을 위해서 다양한 과들이 함께 논의하고 토의해 의료적 결정을 하는 것에 대해 중요하게 논의했습니다.
Q. 트랜스젠더∙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 제8판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요?
이번 8판을 번역할 때에도, WPATH에서 가이드라인을 만들 때에도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전문가 감수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감수를 했다는 점입니다.
성소수자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그들의 의견을 함께 넣어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는 것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한국어판 발간 의의는 무엇인가요?
의료적 가이드라인이 있으면 기본적으로 진료하는 의사들 입장에서 어떤 의료를 시행할 때 결정을 내리기가 쉽죠. 정해진 것이 있으니까요. 환자한테 양질의 진료를 제공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또 환자들의 알 권리도 증진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진료를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있어서 진료의 일관성, 적정성이 유지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가이드라인이 나중에는 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미쳐, 더 많은 환자들이 양질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국가적 정책을 만드는 데에도 꼭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Q. 나아가 우리나라 자체적인 가이드라인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전 세계적으로 모든 학계에서 동일한 가이드라인이 적용된다고 보기 때문에 한국만의 특별한 가이드라인이 생기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다만 트랜스젠더건강관리실무표준 제8판 한국어판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를 한국 사회에 적용시키기에는 아직 사회적인 면이나 일반 대중들의 동의 등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고유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기보다는 전 세계적인 기준이 되는 가이드라인의 등장이 한국 사회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Q. 이 밖에 하시고 싶으신 말씀 있으신가요?
트랜스젠더건강관리실무표준 제8판 한국어판 발간으로 성소수자 진료의 표준이 만들어졌는데 이를 바탕으로 결국은 ‘정책 변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에 계신 선생님들 몇 분과 여러 의료기관 내에서 한국 최초로 트랜스젠더 코호트 연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국내 ‘트렌스젠더’라는 특정집단의 생애 주기에 걸친 건강, 행동, 의료 등의 자료를 전향적으로 추적 조사하며 자료를 수집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나라 성소수자가 어떤 건강상태에 있고 어떤 의료, 진료를 받고 있으며 의료 진단 결과는 어떤지 등에 대한 연구 자료들을 모을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에 발표한 ‘트랜스젠더∙성별다양성이 있는 사람을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 제8판과 더불어 앞으로 성소수자 의료 시스템을 변경시켜나갈 좋은 근거 자료가 되리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