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1일은 120년의 대한민국 의료사에 있어서 큰 획을 긋는 날이다. 전문가평가단에 의한 시범사업이 경기, 광주, 울산 세 지역에서 시작된다. 의료계의 숙원이었던 자율규제의 교두보가 마련되는 날이다. 전문가 단체의 생명은 스스로 자정하는 자율정화(self-regulation)에 있다.
전문가로서의 고도의 지식 수준을 유지하고 전문가로서의 권위와 신뢰유지에 필수적인 사항이다. 그 동안 의료계에서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당연히 담당해야 할 의료규제(medical regulation)의 권한이 전무한 상태였다. 그 동안 의사단체는 자율징계권 확보를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이러한 노력이 정부와 사회에 전달되어 곧 자율징계권의 일부를 의사단체에게 맡겨질 상황이다.
전문가평가단이라는 이름으로 시범사업이 시작된다. 대한민국 의료 역사에서 어쩌면 실제적인 자율규제 권한을 가진 최초의 활동이다. 전문가평가단 시범사업이 좋은 결과와 피드백을 가져오기 위해 시범사업에 앞서 자율징계권의 확보의 목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평가단의 운영의 목적은 자율 징계활동을 통해 비윤리적인 의료행위나 범죄를 한 회원들에 대한 징계를 함으로서 전문가집단으로서의 고도의 품위와 의학수준을 유지함에 있다. 더 나아가 전문가평가단의 활동이 징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을 계도하고 발전된 수준으로 회원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더 큰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전문가평가단 시범 운영 안을 살펴보면 차후 공정성과 법리적으로 보완해야 할 부분이 보이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운영 안으로 판단된다. 무엇보다도 의료 전문직으로 전문가의 학문적 자율성(Academic Autonomy)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배어있다. 하지만 시범사업에 앞서 현재의 의료계의 내부 역량을 돌아볼 때, 자율규제를 제대로 운영할 만한 지적 성숙도와 의지가 상당히 미흡해 보인다.
이번 전문가평가단 시범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 몇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들이 시범사업과 함께 진행되고 준비되었으면 한다.
첫째, 의료계 내부의 공감대형성을 위해 자율규제에 대한 이념교육이 필요하다. 아무리 바빠도 실을 바늘허리에 매어 사용할 수 없다. 자율징계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이념무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대한민국 의료계는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직에 대한 개념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어, 전혀 전문가답지 못 한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물론 이러한 밑바탕에는 교육과 의료시스템의 문제가 큰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이유를 굳이 분석을 해 보자면 먼저 유교사상에 젖은 선비의식 혹은 선민의식이 의사집단에 널리 퍼져 있어 보인다. 자율성과 자율규제를 요구하지만, 그 내면을 들어다 보면 나를 귀찮게 하지 말고 내버려두어 달라는 안일한 개인주의적 생각이 있는 것 같다. 의료계의 주장과 일관되지 않은 행동을 보이는 이중성은 의사들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키고 있다.
그와 함께 일제 식민지 의학의 잔재가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일제 식민지교육의 결과로 의료 전문직으로서 갖추어야 할 두 축인 자율교육과 자율규제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제도적인 면에서도 현대의학이 들어 온 후 일제 식민지하의 제도와 문화가 남아있어 관 주도형의 정책이 전문가주의를 발달시키지 못한 것이 큰 원인 중의 하나이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라면 의사 연수교육을 의사단체에서 주관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정부에서 연수교육을 주관해야지 의사단체에서 연수교육을 대신 담당해야 하냐’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면허신고도 당연히 의사단체에서 하는 것이 맞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정부의 일을 의사단체가 대신 해주냐’고 항변하는 주장들이다.
의사단체가 전문가 단체로서 자율교육을 주관하고 면허관리를 담당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면허나 의학 전문직업성(Medical Professionalism)에 대한 교육을 전혀 접해 보지도 못하고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의사들의 무지한 분노들이다.
어느 집단이 힘을 얻어 행동하려면 내부적인 합의와 결속이 필요하다. 그 방법은 이념무장에서 시작된다. 왜 면허관리를 자율적으로 해야 하는지, 자율을 택할 것인지 타율의 간섭에 끌려 갈 것인지 의사단체 전체에 집단적인 이념무장이 필요하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교육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무엇보다도 면허에 대한 개념과 관리주체, 자율 정화에 대한 이념 무장이 필요하다. 의사 모두가 사회계약(Social Contract)을 기초로 한 의학 전문직업성(Medical Professionalism)과 면허의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이다. 특히 회원들을 이끌고 가는 의료계 지도자들에 대한 이념 무장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들에게 이념무장 교육이 절실하다.
의사단체가 결연한 자정의지를 가지려면 먼저 이념무장을 통해 책임 없는 자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마음자세와 전문가로서 갖추어야 할 역량들을 키워가야만 진정한 전문가주의를 실현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사협회는 회원들에 대한 내부 결속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자율규제에 대한 이념교육을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추진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전문가 평가단과 자문위원회 등의 조직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재원마련이다. 의사직의 특성상 직접 진료행위를 해야만 하는데 진료나 교수활동 등을 접어두고 현지 조사와 대면 조사 등의 활동을 하려면 상당한 운영비용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조직을 뒷받침하기 위해 문헌조사 및 사례분석 등에도 적지 않은 예산이 필요할 것이다.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을 정부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돈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셋째로 조직을 운영할 전문 인력을 양성해야 할 것이다. 중앙윤리위원회와 지부윤리위원회가 구성이 되어 있으나 구성을 보면 외부인을 제외한 의사위원들의 면면이 대부분 각 직역에서 추천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각 직역에서 맡고 있는 직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독립성과 공정성에도 문제가 되고 있다.
윤리위원회의 공정성과 권위,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윤리위원을 맡는 동시에 다른 직책들은 모두 사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실제적인 역량에서도 회원을 징계하는 절차적인 방법과 법리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가 않아 보인다. 의학 전문직업성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철학을 갖춘 분들이 참여했으면 한다. 위원으로 참여하시는 분들은 절차적 정의와 실제적 정의를 잘 지키고 판달 할 수 있도록 별도의 교육이 필요하다. 그와 함께 위원들을 도와 실무적인 행정절차 및 문헌 수집과 조사결과 정리 등 행정사무를 원활하게 진행할 전문행정요원들의 교육도 필요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 자율징계권 가져오기는 쉬워도 이를 지켜나가려면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의료계의 변화와 결연한 의지를 바탕으로 정부와 의료계가 운영 재원과 전문인력 양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수고하고 애쓴 대한의사협회 의사면허제도 개선 및 자율징계권 확보를 위한 특별위원회와 의료정책연구소, 정부관계자의 노고에 찬사를 보낸다. 이번 시범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환자의 안전이 확보되고 전문가주의가 발전하도록 의료계와 정부가 마음을 열고 지속적인 연구와 노력을 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