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유행하던 때, 처음에는 사회적 혼란이 있었지만 개인들은 금세 새로운 일상에 적응했다. 적응한 개인으로 이루어진 집단에서는 새로운 사회 현상이 생겨났고, 사회는 크게 변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변화’는 새로운 방향으로 간게 아니라 기존의 더디게 진행되던 것들을 가속화 시켰을 뿐이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전염병은 시민사회의 사회경제적 수용을 가속화 하였고, 그에 따라 비대면문화가 확산되고, 양극화 격차는 심화되었으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도 빠르게 이루어졌다.
2023년도 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이렇게 변화된 사회속에서 빈곤, 실업, 소득상실의 구(舊)사회적 위험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으며 기존에 있던 돌봄 공백과 사회적 관계의 위기문제가 더욱 급부상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경향성은 의료계에서도 비슷할 것이다. 의료 개혁이라는 변수 아래에서 필수의료, 그 중 응급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이 아닌 기존의 문제점들이 더욱 빠르게 가속화되는 쪽으로 ‘변화’가 생길 것이다.
뉴스에서 수도 없이 떠들어대던 응급실 뺑뺑이, 남발하는 의료소송으로 인해 무너져가는 의사-환자간의 신뢰관계, 응급실 진료전달 체계의 미흡함, 젊은 의사들의 ‘바이탈’ 전공기피는 이미 막을 수 없는 메인스트림이 되었고, 2000명 의대 증원을 포함한 필수의료패키지는 이러한 물살에 더욱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채는 사람들은 앞장서서 환자를 보던 응급실 의사들일 것이고, 가장 크게 체감하는 건 의료계 종사자, 정부도 아닌 사회적 약자 즉, 의료 소비자일 것이다. 일명 ‘필수의료패키지’(이하 필의패)가 초래할 어떠한 변화들에 대해서 의사와 의료소비자 두 개의 시선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야한다.
의료인 입장
정부의 의료개혁 1차 실행방안에서 응급실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예상되는 부분은 ‘적정 의료이용 지원체계 확립’ 파트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은 전문의뢰제를 통해 의료이용 단계에 따른 의료자원의 분배를 개선하고, 비용구조를 개선해 본인 부담금을 상승시키는 것, 경증 지역의료기관 및 발열클리닉 등의 확대와 병행, 그리고 의사의 전문적 판단에 따라 다른 의료기관으로 전원시키는 경우에는 진료거부로 보지 않겠다는 ‘자의적 판단 방지’ 항목이다.
실제로 정부는 지난 9월부터 지역응급 의료기관 및 센터의 경증환자의 본인부담금 비율을 90%까지 끌어올렸고, 전문의 진찰료를 한시적으로 인상할 것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응급의학회는 환영의 뜻을 밝히며 속도감 있는 집행을 통해 실효성 있는 지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경증환자의 본인부담금 비율 상승과 전문의 진찰료 인상은 전부터 응급실 내부에서 요구하던 바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해결책이될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먼저 개인의 본인부담금 증가는 실비보험을 통해 완충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전문의뢰제가 적절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의사와 환자간 원활한 소통’이라는 전제조건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또 전문적 판단에 따라 다른 의료기관으로 전원시키는 경우에는 진료거부로 보지 않겠다는 ‘자의적 판단 방지’ 항목은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환자를 전원하거나 재이송 중 상태가 악화될 시 이 판단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의사가 부담하는 것으로 오인될 여지가 크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총체적인 관점에서 짚고 갈 문제가 있다. 중증도에 따라 기관별로 환자를 배분한다는 개념은 사회적 비용 측면에서는 효율적이지만 새로운 전문의를 양성하는 ‘수련제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환자의 경중을 감별하는 시점은 환자가 응급실에 첫 발을 딛는 순간이 아니다. 의사는 환자를 응급실 베드에 눕힌 채로 여러 가지 검사를 통해 증상과 징후를 살핀 다음 퇴원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경증인지 중증인지 판가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판단력은 수많은 경증환자와 중증환자를 섞어서 보는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과정의 핵심 목표는 충분한 실습 기회를 통해 다양한 환자군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증만 보는 병원, 중증만 보는 병원이 생긴다면 경증에서 중증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환자를 보는 한명의 전문의가 아니라, 오직 감기만 볼줄 아는 전문의 혹은 중환자만 볼 줄 아는 전문의가 대거 배출될 것이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개혁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어느 누구의 공감과 지지도 받지 못한 채 핵심을 빗겨가고 있다. 정부는 응급실의 미래를 마치 럭비공처럼 예측 불가능한 변수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니 더욱 옥죄고 통제하는 방법만이 문제를 최소화 할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 변화의 방향은 변함이 없다. 마치 농구공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좀 더 빠르게 튀어오를뿐이다. 행정가는 단지 ‘책임소재’만 더 추궁할 것이고 환자-의사관계와 응급실의 문턱은 더 깊고 높아질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알던 응급실이 조금 더 빠르게 같은 방향으로 변할 뿐이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급실을 ‘럭비공’마냥 바라보는 정부의 불안한 시선은 응급실에 대한 ‘무지’로부터 나온다.
서울대 비대위 토론회에서 장상윤 사회수석이 “소송이 무서워 환자를 가려 받는 의사가 진짜로 있을 것 같진 않네요(웃음)”라고 발언한 것을 보면, ‘정말로’ 공이 어디로 튀어 오를지 몰라서 우왕좌왕 하는 것 같다. 응급실 의사는 High risk Law return을 외치며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속에 신속한 결정을 내리면서도 의료소송이라는 지뢰밭길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고, 이는 정부정책 이후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의료소비자 입장
의료소비자들에게 응급실은 의료서비스의 불평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차가운 공간이 될 것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 계층에게 더 냉혹하다. 처음부터 값싸고 좋은 품질의 육각형 의료를 누려온 대부분의 국민들은 관성처럼 기존의 방식으로 의료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
경증환자의 본인부담금 상승으로 의료수요는 일시적으로 줄어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엔 아무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담뱃값인상이 금연율 상승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본인부담금 인상 정책 시행 초기에 의료소비자들은 ‘경증이기 때문에 돈을 더 지불한다’라고 이해하다가도 종국에는 ‘경증이어도 돈만 더 내면 된다’ 라는 개념이 자리 잡힐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소비자들의 욕구를 발빠르게 캐치한 민영보험사들은 새로운 상품을 출시할 것이다. 이를테면 경증환자 전용 응급실 실비보험 같은 것들 말이다. 결국 경증환자의 응급실 이용률에는 큰 차이 없이 사회적 여건에 따른 응급의료서비스 양극화만 심해질 것이다. 신중하지 못한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가장 보호되어야 할 약자부터 소외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의료비를 부담하기 어려운 사회 경제적 약자들, 오직 그들만이 경증인지 중증인지 알지도 못한 채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치고, 건강문제를 방치하다가 더욱더 고립된다.
의사와 환자관계 역시도 이 방향성 그대로 불신관계가 더 악화만 될 것이다. 의료진에 대한 신뢰가 약해진 환자들은 단지 최선의 치료결과가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이유로 들어 본인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불만을 이야기한다.
최근 5년간 의료분쟁조정위원회에 접수된 민원은 27만건이다. 연간 5.4만건에 달하는 숫자는 의사 2명중 1명이 1년에 한번 의사-환자간 대화로 해소되지 못하는 ‘갈등’을 겪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다 민사,형사 소송까지 더하면 그 수는 더욱 많아진다.
이미 이렇게 되어버린 환경속에서 의사와 환자간의 신뢰관계가 좋아질 리 만무하지만 정부의 정책계획을 보면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지 조차 의문이 든다. 오히려 환자대변인 제도를 신설하여 3억원상당의 예산을 배정하고, 의료전문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쟁점사항에 대해 적절하게 제시할 수 있도록 하여 의료분쟁에 더욱더 불을 붙이려 한다. 정책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지만, 파탄 난 의사와 환자관계를 회복하는것과는 거리가 멀다.
코로나 때 겪었듯 변화의 방향은 지금과 같을 것이며, 정부정책처럼 통제만 강화하는 방식은 변화의 가속페달만 밟을 뿐이다. 응급실의 문턱은 높아지고, 그 안의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문제의 답은 전문가와 의료소비자들로부터 이미 제시되어 있다. 모두의 손을 보태면 빨라진 공을 놓치지 않고 단단히 붙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의료개혁의 주체는 정부 혼자가 아닌 정부와 의료계를 포함한 ‘국민’임을 인식하고 한번쯤은 브레이크를 밟을 때가 되진 않았는지 성찰해 보아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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