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명 하에 의료에 대한 산업적 측면의 접근과 경제적 논리에 매몰된 잘못된 방향성으로 일련의 보건의료 규제완화 정책을 무리하게 강행하고 있다. 그 위험성에 대한 전문가 단체의 합리적 의견을 무시하고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보건의료 정책의 방향성 실종을 초래한 독선과 아집의 투영은 이미 그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이러한 무분별한 규제완화 정책이 불러올 국가적 피해와 국민적 고통의 재생산으로 다시 한번 안전불감증에 빠진 우리나라의 또 다른 참사로 기록될까 심히 우려되는 시점이다.
작년 12월 28일 대한민국 정부는 경제 단체의 건의를 토대로 규제개선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 아래 카이로프랙틱 자격 및 문신사 합법화, 의료기기와 구분되는 미용기기를 허용하려는 다른 한편으로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 및 보험적용 확대 추진 등을 포함한 규제개선과제(이른바 규제 기요틴)를 발표하였다.
우선 규제기요틴 과제 중 가장 우려스러운 문제는 바로 한의사에게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하는 과제이다. 이는 의료법상 규정된 면허범위를 벗어난 위법한 의료행위로 무면허 의료행위를 정부 스스로 허용하겠다는 것으로써, 환자의 치료시기를 지연시켜 증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등 국민건강을 악화시킬 뿐 아니라 국가 의료체계를 무너뜨리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특히, 의료일원화가 전제되지 않고, 의사와 한의사로 이원화된 면허체계 하에서 한의사가 의학적 원리에 근거한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대한의사협회는 더욱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또한, 의료행위에 대한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것은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하고, 의료적 중증도나 긴급성, 치료효과성, 비용효과성 등을 고려하여 결정되고 있으나, 이를 무시하고 체계적인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정치적인 이유로 국민들의 감정에 호소하여 비정상적으로 한방의료행위에 대한 급여화가 추진되는 것은 건강보험 재정 낭비 등 악순환만 초래할뿐더러 이는 고스란히 국민 의료비 부담으로 전락할 것이다.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하는 방안과 더불어 정부는 또한 문신행위와 카이로프랙틱 행위를 의료행위에서 분리하여 비의료인도 소정의 관련 교육만 받으면 누구나 행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비의료인에 의해 문신행위와 도수치료가 이루어져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무분별하게 의료시술 관련 자격 분야를 신설하는 것은 행위의 침습성과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과 위험성을 감안할 때 국민건강 차원에서 큰 위해가 될 수 있음을 정부는 인지해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의사-환자간 원격진료를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안과 의료서비스산업 선진화 방안의 연장선상에 있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일부 의료기기를 미용기기로 분류하여 미용사에게 허가해주는 공중위생관리법 개정안, 문신행위를 의료행위와 분리하여 국가가 권장하는 문신사법 등 현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국회 계류 법안들을 대거 규제기요틴 과제에 포함시켰다. 과연 이것이 정부가 말하는 불필요한 규제완화인 것인지, 국민을 위한 규제철폐인지 되묻고 싶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안전 문제에 대해 객관적인 실체를 국민 앞에 명백히 밝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전성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강행되고 있는 불안전한 원격의료 시범사업 추진, 그리고 학문적 원리와 교육과정, 임상적 경험 등 전문가적 경험을 충분히 쌓은 의사에게도 환자의 진단과 판독, 그리고 치료라는 일련의 과정이 매우 신중하고 세밀함이 요구되는 영역을 경제적 논리로만 접근하여 개방하자는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사용과 비의료인의 무면허 의료행위 조장 등 대대적인 규제완화라고 칭하는 규제기요틴의 수많은 과제 중엔 ‘국민 안전’을 위한 것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국민의 건강권 보호를 위한 면허제도는 결코 타도 대상인 나쁜 규제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지켜야 할 최후의 안전핀임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규제’란 규칙이나 규정에 의하여 일정한 한도를 정하거나 정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음을 뜻하며, ‘규제완화’란 정부의 간섭과 통제 하에 놓여있던 영역을 민간부문, 즉 시장경제에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연 안전성 논란에 휘말린 원격의료, 비전문가의 무면허의료행위 조장 등이 일자리 창출과 산업적인 측면을 고려한 경제적 규제로써 완화될 대상인가?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보건의료 분야의 ‘규제기요틴’ 과제들은 사회적 규제로써 국민의 건강과 생명, 안전을 위해 오히려 강화되어야 함이 맞지 않겠는가?
이처럼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중요한 보건의료정책을 정부가 전문가들과의 논의 및 충분한 검토 없이 경제적ㆍ정치적인 목적으로 강행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우리 의료계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현대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암 오슬러가 ‘의술은 불확실성의 과학, 확률의 예술이다'라고 말했듯이 길고 긴 학문과 수련, 임상의 과정을 거친 의료의 전문가인 의사 또한 매순간 환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렇듯 전문성이 매우 깊이 요구되고, 작은 실수로 인해 환자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는 의학을 돈의 수단으로 악용하여 규제를 철폐하고자 강행하는 정부에게 우리 의료계가 더 이상 수수방관 하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 번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