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좋아한다. 마시면 다른 사람들 보다 많이 마신다 -소주로.
그런 내가 수십년 사랑해온 소주를 10여년 전부터 와인으로 바꿨다. 가장 큰 이유는 외국인들과의 만남에서 국제 문화코드인 와인이 필수적인 까닭이다. 와인을 모르면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와인을 마시다 보니까 몸에 무리가 안간다. 나이가 들면서 소주 3~5병 마시면 다음날 아침 찌뿌드드한데 와인 1병 마시면 거뜬하다. 소주 1병과 와인 1병의 알콜량은 거의 비슷한데, 삼겹살에 소주 3병 마실 시간에 와인은 1병이면 된다.
10년전에 우리나라 최초의 와인동호회에 가입했는데 이름이 IN VINO VERITAS - “와인속에 진실이 있도다”. 2천년 전에 로마에서 유행하던 역사 깊은 말이다. 이 동호회에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이 꽤 나온다. 대부분 외국계 회사의 CEO거나 중역들이다. 이 분들이 직원들과 회식할 기회가 많아서인지 보신탕에 익숙한 편이다. 삼복이 가까워지면 슬슬 발동을 걸면서 충동질하는 쪽은 이 분들이다.
좋다!!! 명색이 와인동호회인데 “와인과 개고기의 궁합에 대한 세미나” 한번 엽시다. 청계산 아는 전문집에 누런 똥개 중자로 한 마리 시켜 놓고 어떤 와인이 좋을까 궁리해 보니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음식은 맵거나 달콤하고 짜기도 하지만 싱겁거나 담백한 맛을 내기도 한다. 부침이나 전은 화이트 와인과 아주 잘 어울리는데 레드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도 꽤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불고기 · 갈비 · 양념닭과 같은 소스가 좀 강한 육류들이다. 이런 음식에는 떫은 타닌 성분이 많이 들어가 무거운 느낌이 드는 와인보다는 오히려 가벼운 느낌의 와인이 잘 어울린다. 호주의 시라즈, 프랑스의 시라, 아르헨티나의 말벡 품종이 해당된다.
그러면 개고기는? 개고기 수육은 연하고 담백한데 찍어 먹는 양념장이 강하다. 보신탕은 맵게 한 것도 있고 된장에 구수하게 만든 것도 있다. 담백한 수육에는 삐노 누와 품종이 어울리는데···. 에라 , 모르겠다. 참석자 여러분 !! 각자 집에서 4종류 중에 1병씩 가지고 오실 것. 청계산에 모여 보니 4종류가 골고루 갖춰 졌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먹는 방법을 선택해서 결과를 발표할 것. 그래도 세미나니까.
나는 수육을 소금에만 살짝 찍어서 부추와 함께 먹으면서 와인은 삐노 누와로 선택했다. 강하지 않은 삐노 누와가 담백한 수육과 조화를 이룰 것으로 기대했는데 역시 틀림없다. 다른 분들도 내 방법이 제일 맛있다고 따라 한다. 수육을 양념장에 찍어 먹을 때는 향이 강한 호주의 시라즈와 궁합을 맞추고 탕을 먹을 때는 프랑스의 시라를 함께 했다. 1잔이 2잔되고 2잔이 석잔, 넉잔··· 취기는 오르고 고기는 맛있고 세미나고 발표고 다 잊어 버리고 모두들 대취하고야 말았다.
다음해 5월, 삼복은 아직 멀었는데 벌써 들썩들썩하더니 날씨도 좋은데 빨리 하자고 난리다. 이번에는 개고기와 일면식도 없는 한국생활 초짜 햇병아리들까지 줄줄 따라 왔다. 끝나면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금년부턴 2번 합시다”. 그 뒤로 매년 2번씩 이 세미나를 하고 있다. 이제 곧 여름이니 청계산에 빨리 예약해 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