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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현실반영된 따뜻한 의학드라마 기대

이승수 부산의대 비뇨기과 전공의


이승수 부산의대 비뇨기과 전공의 1년차
 
지금 텔레비전이 현대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시대에 한참이나 뒤떨어진 소리가 되겠지만, 틈만 있으면 어느 자세에서라도 눈을 붙일 만큼 피곤한 대학병원 전공의에게도 요즘 유행하는 의학드라마 열풍을 다른 세상 이야기로 치부할 순 없는가 보다.
 
굳이 환자와의 라포(Rapport)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외과의사 봉달희’나 ‘하얀 거탑’의 등장인물과 줄거리라도 대충 알고 있어야 얼마 전 필자가 들었던 “선생님은 봉달희에 나오는 이범수 닮았어요” 같은 환자가 던지는 친근한 인사말에 눈웃음이라도 지어줄 수 있을 것이다. 
 
외래 진료를 기다리는 대기실에 설치되어 있는 텔레비전에는 지난 주 ‘하얀 거탑’ 방송분이 재방송되고, 6인실 병실 환자들 사이에서는 ‘하얀 거탑’ 내용을 두고 토론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필자도 매회 그 드라마들을 챙겨 볼 순 없지만 직업 특성상 관심 가는 것은 사실이다. 시간이 나면 의국에 여럿이 모여 시청도 하고 다른 전공의 선생님들과 토론도 한다. 남의 눈의 티끌이 더 크게 보인다고 드라마에서 보이는 오류나 현실과 동 떨어지는 부분들이 토론 주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 이미 텔레비전은 교과서 이상으로 현대인들의 의식 구조를 지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드라마에서 비춰지는 의사나 병원의 모습이 현실의 전부인 것으로 인지될 수 있다. 따라서 때론 의학드라마가 잘못 전달하는 부분에 대한 비판과 의학드라마를 보는 또 다른 시각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의 의학드라마 열풍은 사실 미국의 의학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조금은 급하게 시작되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수 년 전 전국 의과대학 입시 경쟁률을 높이는 데 한 몫을 한 ‘종합병원’이라는 인기 드라마가 있었고, 이후로도 몇몇 의학드라마가 있었지만 그다지 큰 인기를 끌진 못했다. 하지만 최근 ‘그레이 아나토미’, ‘하우스’, ‘스크럽스’ 등 각기 특색 있게 병원 생활을 해석하면서 완성도 높은 미국 의학드라마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국내 시청자들 사이에 의학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외과의사 봉달희’와 ‘하얀거탑’은 이러한 적절한 시기에 나온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 비해 의학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자본이 증가되었고, 흥행을 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되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해외 드라마의 인기를 의식해서 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병원의 모습과 눈에 띄게 차이 나는 모습에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런 비판은 새로운 의학드라마가 나올 때 마다 제기되었던 문제이다. 아무리 자문을 받고 열심히 드라마를 만들어도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워낙 다양하고 전문적이라서 실수하는 부분이 생기고 연기자들이 실제 의료인이 아니다 보니 의료인의 눈으로는 실소를 짓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어색한 시술 연기가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혹자는 매번 되풀이 되는 비판에 대해 픽션은 어디까지나 픽션으로 봐야지 현실과 너무 지나치게 비교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텔레비전 드라마가 사람들의 삶과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현실을 지나치게 왜곡하거나 사람들이 오해할 만한 장면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것이 사람들의 삶과 직결되는 의학을 다루기 때문이다.
 
과거와 비교 하면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의학드라마에서는 의료행위와 관련하여 많은 오류들이 발견된다. 환자의 질환과 전혀 무관한 X선 필름을 보면서 토론을 한다던가, 심폐소생술시 전혀 엉뚱한 위치에 가슴 압박을 하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극중 연기자들은 말도 안 되는 처방을 내릴 때도 있고 시술할 때 너무 어설픈 모습을 보여 웃음보를 터뜨릴 때도 있다.
 
드라마를 보는 의사들의 눈에 일차적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마 이런 드라마 속의 잘못된 점들일 것이다. 때론 드라마 내용의 흐름보다도 이런 오류들을 잡아내는 재미에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의사실에 모여 그것들을 지적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하지만 좀 관대하게 생각해 보면 전문 의료인에게 보이는 그런 실수들은 비전문가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뇌 CT를 어떻게 판독하고, 위 절제술을 어떻게 시행하느냐는 극이 전개 되는 데는 사실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드라마 속의 의사들이 환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지를 우리는 더욱 주목해야 한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큰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을 보는 이로 하여금 간접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영상과 음향이 가미된 아주 흥미진진한 간접경험도구이다. 따라서 의학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 의사, 간호사, 환자, 보호자가 되어 드라마 속 인물들의 태도를 가치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그 도구는 너무 제한적이어서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때론 등장인물과 어떤 상황의 한 면만을 보기 쉽고 그 장면을 일반화하게 된다.
 
의사가 환자의 아픔에 눈물 흘리면 마치 실제 있었던 일 인양 방송국 인터넷 게시판엔 그 캐릭터를 응원하는 글이 무수히 올라온다. 제약회사의 리베이트를 받는 의사의 모습이 방송되면 우리나라의 모든 의사를 질책하는 여론이 금세 형성된다. 위험한 환자를 돌려보내는 봉달희의 모습은 젊은 의사들을 불신하는 풍조를 낳기 쉽고, 실력은 있으나 차가워 보이는 장준혁의 이미지는 의사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를 깨기 힘들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고정된 이미지들이 시청자에게 각인 되었을 경우 때론 그 사람이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와 환자의 관계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드라마 속 인물들의 성격이 다 다르듯 실제 병원의 의사들도 그 캐릭터가 다 다르기 때문에 환자들이 의사를 처음 대했을 때 선입견을 갖기 쉽고, 이런 상황은 치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런데 드라마라는 픽션의 특성상 어떤 이벤트를 설정한다 던지, 인물의 성격을 정하는 것과 같은 것은 때론 현실이 양보해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이야기 할 것은 의사들의 입장에서 의학드라마들이 제대로 담아주었으면 하는 현실이다.
 
먼저 우리나라 병원 진료 체계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 환자가 수술방에 들어가는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간단히 요약해도 해당과 의사가 환자를 파악하고, 필요한 각종 검사를 하고, 마취과와 상의하고, 수술 및 마취 동의서를 받고, 수술 준비가 이루어진 다음에서야 수술에 들어갈 수가 있다. ‘ER’에서 보는 것처럼 바로 수술에 들어가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고 우리나라 실정과도 거리가 있다.
 
하지만 많은 의학드라마들이 보여줄 거리가 많은 응급질환을 다루면서 현실보다 너무도 재빠른 전개를 보여주기 때문에 응급실에 방문한 환자 및 보호자들이 진료과정에 대해 오해를 할 수 있다.
 
아울러 3차 병원 응급실의 모습도 제대로 다뤄 주었으면 한다. 드라마에서 다루는 응급질환들은 대학병원 등 3차 병원 급에서 다루는 질환이 주를 이룸에도 드라마에 나오는 응급실은 지나치게 조용하다. 현실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는데 말이다. 생명이 위독한 환자와 씨름하는 동시에 술에 취한 사람과 매일 밤 싸움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응급실 당직의의 고충은 그 많은 응급실 장면들 중에서 다뤄진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또한 다양한 의료계의 당면 과제들이 다뤄졌으면 한다. 특정과의 전공의 부족 현상이나 의료법 개정 문제, 의료시장개방 등 의료계가 부딪힌 현실을 조심스럽게나마 드라마 속에 반영되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집중하며 보는 드라마는 그 어떤 도구 보다 훌륭한 여론 형성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의사들의 생활에 대해 좀 더 현실적으로 보여 줬으면 좋겠다. 의사들이 부유하다는 생각은 너무 굳어 있어 깨뜨릴 방안조차 없어 보인다. 언론에선 빚진 의사들, 폐업하는 병원들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지만 여전히 드라마 속 의사들은 값이 얼마 나가는 지도 모르는 최신형 고급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와인바에서 양주를 먹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 사람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왜 의사들은 흔히 그런 모습으로 비춰져야 하는지 의문이다.
 
소설이나 영화 같은 픽션들은 그것이 현실을 가장 자연스럽게 반영할 때 여러 사람들의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현실을 버리면 공감대를 이끌어 내기 힘들고, 현실을 너무 중요시 여기면 다큐멘터리가 되어 버린다.
 
매일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시간을 기꺼이 내 주고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 역시 오락과 현실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현대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픽션이다. 그리고 의학드라마는 병원을 중심으로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다룬 픽션이다. 하지만 그 픽션의 모습을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의학드라마는 현실을 다루는데 좀 더 신중해 져야 한다.
 
의사들의 현실을 그대로 좇는 의협 홍보용 비디오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사도 드라마의 시청자이므로 의학드라마는 그들의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드라마의 사회적 기능을 생각했을 때 의학드라마가 의료인과 일반인의 견해차를 줄이는 훌륭한 의견 조율 기구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닥터 고토의 진료소’란 일본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유명한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에 나오는 의사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외과의이면서 외딴 섬에 가서 진료를 한다. 첨엔 그와 서먹서먹했던 마을 사람들과 시간이 지날수록 의사와 환자 관계를 넘어 삶의 동반자가 되어가는 모습은 눈물겹도록 감동적이었다. 때론 우리는 의학을 너무 딱딱하고 차가운 학문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든지 아름답게 그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끝으로 오늘도 병원에서 밤을 새며 환자를 돌보고 있을 많은 전공의들이 의사 편을 들면 무조건 비뚤어지게 보는 사회의 시선에 실망하지 않도록 그들의 현실을 좀 더 정확히 담는 드라마가 만들어 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의사가 되었을 때의 초심을 잃지 않도록 장준혁의 외제차 보다는 봉달희의 열정이 담긴 따뜻한 의학드라마가 앞으로 많이 만들어 졌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