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금연학회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제기한 담배회사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 판결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 이번 판결은 흡연과 질병의 인과관계에 관한 확립된 의과학적 증거를 외면하고, 공중보건 영역에서 발전해 온 질병 발생의 인과관계와 사회적 손해 개념을 부당하게 축소 해석하였다.
또한 이번 판결은 흡연의 의과학적 위험성뿐 아니라, 담배회사가 져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마저 외면한 판단이다.
1. 흡연과 폐암·후두암의 인과관계를 부정한 것은 의과학에 대한 부정이다.
역학적 인과관계 부정은 현대 의학과 보건학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판결문은 흡연과 폐암·후두암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역학적 상관관계만으로는 개별 환자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는 역학(epidemiology)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이다.
암, 심혈관질환, 만성폐쇄성폐질환과 같은 만성질환은 단일 원인(one cause - one disease) 구조가 아닌 확률적, 다요인적 질병 모델을 따른다. 현대 의학은 개별 환자의 질병 발생을 실험실 수준에서 100% 증명하지 않는다. 대신, 대규모 역학연구, 메타분석, 기전 연구 등을 통해 “의과학적인 질병 발생의 인과관계가 확인되었는지”를 판단한다.
흡연의 발암성은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암연구소(IARC), 미국 보건총감 보고서 등에서 수십 년 전부터 ‘확정적 인과관계’로 선언되어 왔다. 이를 다시 “개별 환자 단위에서 직접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현대 의과학적 판단을 무시한 비현실적 요구이다.
2. “다른 위험요인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는 인과관계 부정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판결은 흡연 외의 요인(생활습관, 유전, 환경 등)을 이유로 인과관계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공동원인(co-factor) 개념에 대한 근본적 오해이다.
복수의 위험요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특정 위험요인의 인과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의과학은 이미 흡연이 독립적으로 주요 위험요인(principal risk factor)임을 입증해 왔다. 특히 후두암과 폐암은 흡연과의 상대위험도(RR)가 압도적으로 높은 대표적 질환이다.
“다른 요인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이유로 흡연의 인과성을 부정한다면, 현실적으로 어떠한 환경, 산업 유해물질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
3. “담배의 위험성과 중독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는 판단은 과학적·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
담배 중독성 축소, 은폐에 대한 판단은 국제적 연구 성과를 외면했다. 판결은 담배회사가 중독성과 유해성을 은폐, 축소하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미 국제 소송과 문서 공개를 통해 확인된 사실과 배치된다. 담배회사는 니코틴의 중독성 강화 설계, 흡입 효율을 높이기 위한 첨가물 조절을 해왔다고 이미 확인되었다.
그리고 담배갑 포장에 대나무 그림을 넣고, 운동하고 건강한 젊은이를 표현하고, ‘순한’ 또는 ‘라이트’라는 문구를 제시하면서“덜 해로운 담배”라는 허위·오인 마케팅을 담배회사가 해온 역사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소비자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중독을 강화하고 위험을 왜곡한 기업의 상술이었다.“위험이 알려져 있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부정한다면, 이는 위험성을 알리기만 하면 건강에 나쁜 물질을 만들어 판매하는 기업 책임을 전면 면제하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4. ‘담배회사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은 처벌이 아니라 상식이다.
판결은 흡연을 개인의 선택으로만 바라보고, 담배회사의 책임을 사실상 부정했다. 그러나 이는 이미 국제사회에서 폐기된 시각이다.
담배는 강한 중독성을 갖도록 설계된 상품이며, 중독 상태에서의 선택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보기 어렵다. 특히 담배회사는 수십 년간 중독성과 유해성을 축소하거나 왜곡해 왔다.
이번 소송은 담배회사를 ‘처벌’하자는 소송이 아니다. 담배라는 위험 상품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어온 기업이 그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피해에 대해 정당한 몫의 사회적 책임을 지라는 요구이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미 담배회사에 대한 손해배상, 부담금, 구상권 인정은 공중보건 정책의 일환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만 예외여야 할 이유는 없다.
개인의 선택만을 강조하는 접근은 위험을 설계하고 판매한 기업의 책임을 면제해 주는 논리에 불과하다.
5. 이번 판결은 국민 건강 보호라는 헌법적 가치와도 배치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에 대해 국민의 건강을 보호할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흡연은 단일 산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가장 큰 예방 가능한 사망 원인이다.
그 비용을 개인과 사회가 떠안고, 가해 산업은 법적 책임에서 벗어난다면 이는 정의와 형평의 문제다. 이번 판결은 결과적으로 질병 비용의 사회화, 이윤의 사유화를 정당화하는 판결로 남을 것이다.
6. 대법원은 의과학과 공중보건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다시 판단해야 한다.
대한금연학회는 상고가 예고된 본 소송이 대법원에서 다음을 분명히 확인하고 현명한 판결을 내려주기를 촉구한다.
- 흡연과 폐암·후두암의 인과관계는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 다수 인구집단의 건강 피해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법치국가에서 마땅한 요구이다
- 공중보건 영역에서 요구되는 인과관계 판단 기준은 형사재판의 기준과 달라야 한다
- 담배로 인한 질병발생과 사회적 손실에 대해 담배회사도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이번 판결이 확정된다면, 이는 담배뿐 아니라 향후 모든 유해 산업에 대해 “ 과학이 아무리 명확해도 책임은 묻지 않겠다”는 신호를 주게 될 것이 우려된다.
대한금연학회는 담배회사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고, 끝까지 국민과 흡연자의 건강을 지키고, 담배로 인한 피해가 없는 세상이 올 때까지 우리의 역할을 다할 것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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