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오사카 여행을 갔다가 시내에 있는 <데키주쿠(適塾)>를 찾아갔다. 오사카의대의 발상지 정도 되는 곳으로 2층 목조건물로 잘 보존되어 있다. 내부에는 의학 박물관도 있어 일본 근대 서양 의학 관련 유물들을 전시해 두었다.
진열품들 중에는 파레(Ambroise Paré)의 책도 있었다. 솔직히 깜짝 놀랐다. 파레는 16세기에 활동한 서젼(surgeon)으로 의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책이 일본 땅에 있다니! 놀라움과 부러움으로 한참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파레가 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앙브로아즈 파레(Ambroise Pare)
파레는 1510년 북프랑스에서 위그노파(신교도) 가구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에서 바버-서젼(barber-surgeon)의 도제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유서 깊은 오텔 디외(Hôtel-Dieu)에서 들어가 수련을 받았다. 최고의 교육을 받은 것이다.
4년의 수련을 마친 후 프랑스 육군 원수(元帥)의 주치의가 되었고, 1536년에 북이탈리아의 토리노(Turin) 전투에 종군했다. 26세로 애송이 바버-서젼이었지만 파레는 이 전투에서 완전히 새로운 서젼으로 태어났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3년 후 원수가 죽자 종군의사의 자리에서 물러나 파리로 돌아왔다. 군에서 모은 돈으로 31세에 자격시험도 치고, 결혼도 하고, 개인 진료소도 열었다. 개원은 성공하여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군에서 부르면 전장으로 달려가기를 거듭했다. 그의 종군은 외과학에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파레가 치열한 전장에서 외과학의 신기원을 열어 나갔으니 말이다.
32세에 다시 브르타뉴공작의 주치의로 종군했을 때는 몸에 박힌 탄환 찾는 법을 개발했다. 35세 때인 1545년에 야전 서젼의 경험과 배움을 담아 『화승총과 다른 총기, 창, 그와 비슷한 무기에 의한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 특히 화약 가루에 의한 화상에 관하여; The Method of Treating Wounds Made by Harquebuses and Other Guns』를 출판했다. 유럽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당대 및 후대 서젼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39세에는 해부학과 산과학을 연구했고, 42세에는 다시 종군하여 출혈 치료에 인두로 지지는(cauterization; 燒灼) 기존의 방식이 아닌 혈관 묶기(ligation; 缺札)로 지혈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국왕 앙리2세는 파레의 명성과 실력을 인정해 자신의 시의로 임명해 옆에 두었다. 이후로 파레는 프랑수와2세, 샤를 4세, 앙리 3세의 시의를 잇따라 역임한다.
51세에는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벨기에 출신의 해부학자)의 혁신적인 인체 해부학 도판을 쓴 해부학 책도 냈고, 62세 때는 가톨릭 신자들이 위그노를 공격한 참혹한 <성 바르톨로뮤의 학살(1572년)> 와중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국왕 샤를4세(가톨릭파)가 그를 옷장에 숨겨주어 목숨을 구했다. 65세에 『전집(Oeuvres)』을 냈고, 80세에 파리의 집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1590년).
자, 이제 파레하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토리노전투>에 대해 알아봐야 하는데 그 전에 파레를 괴롭힌 화약무기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화약의 등장이 바꾼 전장과 치료의 풍경
화약은 1천년 전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처음에는 불꽃을 일으키는 성질을 이용해 발사기구나 폭죽을 만들었다. 오락용에 불과했던 이 가루는 13세기 초 몽골 기마군단을 공격하는 살상무기로 놀라운 변신을 한다. 중국인들은 대나무과 쇠로 만든 대롱(管)에 화약을 넣고 돌, 납, 도기 조각들을 넣은 후 불을 붙여 적에게 쏘았다. 살상 효과는 별루였지만 무적의 몽골 기마군단을 벌벌 덜게 한 공포의 무기가 되었다. 13세기 말에는 중국에서는 흔한 도자기 모양을 본떠 만든 철제 주물 장치(항아리 모양의 대포) 속에 화약과 화살을 넣어 발사했다. 일종의 화살 대포였다.
중국의 화약 무기는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대포를 이용해 단단한 바위를 발사해 성벽을 공격했고, 15세기 중반이 되면 본격적인 인마살상 무기로 자리잡았다. 스페인에서 휴대성이 뛰어난 개인용 총기인 ‘불 막대기 혹은 ‘손대포’라 불리는 개인용 총기가 등장했다. 이것이 나중에 화승총이나 머스켓총이 된다. 1525년에 카를5세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는 북이탈리아의 파비아(Pavia)에서 프랑스군에게 총격을 퍼부어 하루 만에 8천명을 쓰러뜨렸다.
화약 무기는 전장의 풍경을 완전히 바꾸었다. 화살이 날고, 칼과 창이 부딪히던 전장은 천둥 같은 폭음, 매캐한 화약 냄새, 검붉은 연기로 뒤덮였다. 부상자의 몸도 전시대와는 달라졌다. 팔다리가 날아가고, 몸에 구멍이 생기고, 찢어발겨져 너덜거렸다. 뜨겁고도 더러운 파편이 몸에 박혔다. 야전 서젼이 갖은 기술을 다 발휘해 병사의 목숨을 건진다 해도 상처에는 염증이 생기며 곧 썩어 들어갔다. 우리는 그것이 혐기성 세균 감염이란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전례 없던 이 상처는 전례 없던 무기 화약의 독이 몸에 퍼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치료는 화약독을 빼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토리노의 잠 못 이룬 밤
고대인들이 사용했던 각종 전쟁 무기들은 정말이지, 내가 묘사하고 있는 무기들과 비교하면 어린아이 놀이나 장난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근대 발명품들은 모양에서나, 잔인함, 효과에 있어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혹한 무기들을 능가한다. - - 파레
파비아에서 프랑스군이 치욕을 당한 후 10년이 지난 1536년 파비아 서쪽의 토리노 전투에 파레가 처음 나섰다. 여전히 상대는 카를 5세의 군대였다. 양측은 화약무기를 동원해 치고 받았다. 많은 부상자들이 의사의 손길을 기다렸다.
종군 서젼들의 총상 치료법은 딱총나무 기름에 당밀을 넣어 끓인 것을 환부에 붙여주는 것이었다. 끔찍한 치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화상을 입혀 조직 괴사를 엄청나게 늘이는 이 치료법은 사실상 부상병에게 2차 가해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파레도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이탈리아의 서젼이 쓴 책에도 나오는 이 치료법을 파레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대로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준비해온 기름이 바닥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부상병들을 그냥 둘 수는 없어 파레는 궁여지책으로 달걀 노른자, 장미기름, 송진을 섞어 고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상처에 살살 붙여주었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파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보급품 부족으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불쌍한 부상병들이 밤새 화약 독이 퍼져 내일 아침이면 다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 걱정과 죄책감으로 밤을 샌 파레는 다음날 일찍 회진을 나섰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자신이 궁여지책으로 치료한 부상병들은 걱정과 달리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연고를 바른 부상병들은 오히려 상처는 더 잘 아물고, 통증도 덜해 잠도 잘 잤다. 반면에 뜨거운 기름 치료를 받은 부상병들은 상처가 덧나 열이 나고 붓고 아파서 밤잠을 설쳤다. 궁여지책의 승리였다!
이 특이한 경험은 파레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 상처에 끔찍하고 해로운 치료를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상처를 부드러운 방법으로 상처를 살살 달래며 치료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책에 나온다고 해서 다 옳은 것도 아니기에 반드시 직접 검증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새로운 치료법을 스스로 만들 수도 잇다고 생각한다. 토리노에서 불면의 밤을 보낸 후 파레는 깨어났다. 덕분에 외과도 깨어났다.
외과를 업그레이드시킨 파레, 외과로 업그레이드된 일본
파레는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 당연히 라틴어도 몰랐다. 그는 책을 많이 썼는데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썼다. 덕분에 동료 서젼들도 쉽게 책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프랑스어로 쓴 책을 두고 라틴어를 구사하는 고매하신(?) 대학 교수들이 파레를 깔보자 파레는 히포크라테스도 모국어인 그리스어로 책을 쓰지 않았느냐며 되받았다. 정작 교수들은 라틴어로 도움이 되는 책을 쓰지도 못했으니.
싸울 사람과는 싸우는 성격이지만 파레는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치료했다. “나는 환자에게 붕대를 감을 뿐, 치료는 신의 몫이다” 라는 훌륭한 명언을 남긴 이도 바로 파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외과 버전이다.
그의 책들은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라틴어로도 번역되어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의 서젼들에게도 필독서가 되었다. 내가 오사카에서 만난 파레의 책은 네덜란드 번역본이다. 아마 어느 네덜란드 서젼을 통해 입수한 것일 테다.
일본은 네덜란드(和蘭이라 쓰고 ‘오란다(Holand)’로 읽었다)를 통해 외과 의술을 배웠다. 사실상 개화를 외과학을 배우고 받아들인 것으로 시작했다. 외과를 필두로 서양 문물은 네덜란드라는 관문으로 들어왔기에 일본은 서양 문물을 ‘오란다류(流)’로 부르고 그 공부를 ‘란가쿠(蘭學)’이라 했다. 초기 난학자들 중에는 (한)의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외과를 배우고 전혀 다른 의사가 되었는데 이들을 ‘오란다류 의사(南蠻醫; 남만은 서양을 뜻한다)’라고 불렀다. 그들은 일본 최초의 서양의사이자 서젼이었다. 그들의 작은 칼은 사무리아의 칼보다 작고 보잘 것이 없었지만 일본의 역사를 바꾸었다.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후의 역사는 우리도 다 아는 이야기다.
이렇게 오사카의 데키주쿠에 남은 ‘네덜란드어판 파레의 외과 책’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권의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무게가 만만치 않은 오사카의 여름이었다.
참고문헌
1.삽화로 보는 수술의 역사/쿤트 헤거/김정미 옮김/이룸/2005
2.닥터스; 의학의 일대기/셔윈 눌랜드 지음/안헤원 옮김/살림/
3.공기의 연금술토머스 헤이거 지음/홍경탁 옮김/반니/2015
4.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어니스트 볼크먼 지음/석기용 옮김/이마고/2003
5.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이종각 지음/서해문집/2013
6.모든 것은 히포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되었다/리차즈 아머 지음/이종석 옮김/시공사/2001
7.Source Book of Medical History/Logan Clendening/Dover/1960
같이 보면 좋은 영화
1.여왕 마고(La Reine Margot, 1994). 성 바르톨로뮤의 학살(1572년)의 현장이 중요한 배경이다.
2.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1994). 의사인 노스트라다무스는 파레와 동시대 인물로 왕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출처: 디아트리트 VOL. 21 NO.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