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발발하자 UN의 결의에 따라 ‘16개국’이 UN의 깃발아래 우리나라에 전투병을 파병한 일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외에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 인도의 5개국이 인도적 차원으로 의료지원단을 파견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스웨덴은 가장 최대규모, 최장기간으로 활동했다.
전쟁 발발 3주 만인 7월 14일, 스웨덴이 제일 먼저 UN에 의료지원 의사를 밝혔다. 8월에 국회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자 스웨덴 정부는 지원단 파견을 자국 적십자에 일임했다. 스웨덴 적십자가 자원자를 모집하자 600명 여명이 지원했고, 그 중 176명이 선발되었다. 한반도 전황이 엄중하던 시기라 SRCFH은 불과 15일 만에 준비를 마친 후 8월24일에 스톡홀름을 출발, 미국을 거쳐, 한 달 만인 9월 23일에 부산항에 입항했다. 전쟁 3개월 무렵이다.
6월 28일 서울, 7월 20일 대전을 내어주었고, 여름을 지내며 한반도의 대부분은 북한의 수중에 들어갔다. 8월 17일에 임시수도는 대구를 떠났고, 9월 초에 미8군 사령부 역시 대구를 떠나 부산으로 철수했다. 이른바 낙동강 방어선으로 불리는 최후의 저지선이 마산~왜관~영덕을 이었다. 하지만 전시 수도가 있던 부산은 전선에서 불과 50~10km 후방이었다. 자칫하면 ‘뎅케르크 철수작전’이 부산에서 재현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
다행히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였고, 이를 신호탄으로 낙동강 전선에서도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격전 속에 많은 부상병들이 생겼고, 그들은 야전병원들이 있는 부산으로 후송되었다. UN군 사령부는 SRCFH 를 부산에 세우기로 결정하고 미 8군에 배속시켰다.
병원 부지로 처음 내정된 곳은, 부산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10Km
에 있는, 주한 미군의 부산기지 사령부인 하야리아 부대(Camp
Hialeah; 지금은 부산시민공원) 영내였지만 더 많은 병상 설치를 위해 부대 남쪽의
서면에 있는 부산상업고등학교에 병원을 설치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9월 23일, 본진이 부산 항에 입항했고,
철야 하역작업과 운송작업, 설비작업을 진행하여 9월25일 월요일
SRCFH는 교사(校舍)의 교실 30개를 개조해 2개 병동, 16개 병실, 진찰실, 수술실로 썼다. 운동장에는 조립식 퀜셋(Quonset)을 설치해 간호사 기숙사, 입원실, 식당 등의 용도로 썼다.
개원 당시에는 병상 200개, 의료진 92명, 행정직원 76명, 원목 1명으로 총 169명의 스웨덴인이 근무를 시작했다. 그 외 청소부, 잡역부, 세탁부, 경비원 등으로 우리국민 200여명이 고용되었다. 부산에서 스웨덴어의 통역은 불가능했기에 부산상고의 교사가 영어 통역을 맡았다. 그 외, 피난민 중학생이 통역을 맡았는데, 이 학생은 나중에 서울의대에 입학했고, 스웨덴으로 건너가 의사가 되었다.
병원장인 그루트 대령(Dr. Carl-Erik Froth)은 겨울전쟁(소련-핀랜드 전쟁; 1939~1940) 중에 스웨덴 적십자병원에서 군의(軍醫)로 일했고, 스웨덴 군 병원위원회 의장을 역임한, 스웨덴 군 의료계의 주요 인사였다. 병원장 외에 의사 8명, 치과 의사 1명, 보건 역학 전문가 1명이 근무했다.
물리치료사들은 1952년 10월부터, 아동 구호를 도맡을 소아과(!) 간호사들은 정전 이듬해인 1954년 1월부터 근무했다. 직원들의 근무 기간은 6개월이지만, 체류 연장이나 재파견을 희망한 경우도 있어 1~2년 이상의 장기 근무자들도 있었다.
개원한 9월 25일은 인천 상륙작전(9월 15일)과 서울 수복(9월 28일) 사이였다. 낙동강 전선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많은 부상병들이 병원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200병상으로 개원했지만 곧, 400병상(10월 초), 나중에는 600병상으로 증설하였다.
가을에 전선이 38도선 이북으로 북상하자, 전선의 배후에 있어야할 야전병원의 특성을 고려해 함경남도 흥남이나 원산으로 병원을 옮길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10월말 중공군의 참전과 UN군의 후퇴로 전선이 다시 남하했고, 이전 계획은 백지화하고 후송병원으로 기능을 전환했다.
전상자들은 열차나 항공편으로 후방의 SRCFH로 옮겨졌고, 상태가 위중한 부상병들은 다시 항공기와 선박편으로 일본이나 미국으로 후송되었다. 후송병원의 기능으로 전환된 덕분에 SRCFH 는 부산을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 수 있었다.
1950년 가을에 전선이 북상하자 줄어들었던 부상병들의 입원은, 겨울에 전선의 남하와 함께 다시 늘어났다. 첫 겨울을 맞으며 동상 환자들도 급증했다. UN군장병들을 치료하는 것이 SRCFH의 임무지만 한국 군 병원으로부터 의뢰되어오는 환자들도 많았다. 더하여 부산의 포로 수용소에 있는 공산측 부상병들의 진료도 맡았다. 스웨덴은 중립국이었고, 적십자병원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1951년 여름, 개전 1년 만에 전선은 원래의 그 자리 근처로 되돌아가 교착 상태에 빠졌다. 7월부터는 정전회담이 시작되었고, 전선에서도 적극적인 작전 전개가 줄어 부상병의 수도 줄었다(미군의 경우만 보더라도 첫 1년 동안 인명 피해의 60%가 발생했다). 부산으로 후송되어오는 부상병들의 수도 그만큼 줄어 SRCFH의 진료부담도 많이 줄었다. 이때부터 SRCFH는 부산의 민간인 구호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시간이 갈수록 대민 진료의 규모는 커졌다. 부산 철도병원이나 적기병원으로 간호사들을 보내 상주시키며 환자들을 돌보다가 나중에는 의사들까지 보냈다. 이곳에서 환자 진료는 물론이고 한국인 의료진들을 교육도 했다. 아울러 상태가 위중한 환자들은 SRCFH에 입원시켰다. 대민 진료는 더욱 활성화되어 1952년 5월부터는 아예 원내에 민간인 외래 진료소를, 1953년 4월에는 결핵 병동을 열었다. 나중에는 의료진들이 BCG 접종 사업까지 벌였다.
이 무렵 150병상 규모를 운용하면서, 연간 외래 53,000명 정도를 진료했는데 환자들의 대부분은 결핵이나 기생충 질환자였다. 병원에는 스웨덴인 의사 11명, 간호사 35명, 그리고 한국인 의사 19명과 간호사 40명이 함께 일했다. 아울러 국내 최대규모의 혈액은행도 운용했다. 하지만 정전 후에 계속 주둔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스웨덴 국내에서 일었고, 1957년 3월에 병원 문을 닫았다. 6년 6개월동안 부산에서만 1,124명의 스웨덴인이 이 병원에서 20개국에서 온 200만 명 이상의 환자들을 돌보았다.
하지만 모두 다 떠난 것은 아니다. 소아과 의사와 간호사를 남겼고, 한국인 의사들과 힘을 모아 투베르쿨린 검사와 BCG 접종 사업을 펼쳤다. 1957년 4월부터 1958년 9월까지 모두 61,172명에게 투베르쿨린 검사를 했고, 그 중 24,983명에게 BCG 접종을 했다.
UN 의료지원단 5개국 중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는 문화, 언어, 지리적으로 근접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로 각각 야전병원, 병원선(Jutlandia호), 이동외과병원(NORMASH)을 운용해 역할 분담을 한 듯 보인다. 이들 3개국은 와해된 우리나라의 의료체계를 복구하기 위한 논의를 1951년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전후에 이들이 철수하게 되자 우리 정부는 계속적인 진료를 요청한다. 이에 부응하여 3개국, UN한국부흥위원회(UNKRA), 한국 정부는 3자 협력으로 스칸디나비아 교육병원을 세우기로 했다. 1958년에 을지로 6가에 있는 서울시립시민병원 옛 터에 450병상 규모의 스칸디나비아병원으로도 불린 국립의료원(National Medical Center)이 문을 열었다.
89명의 스칸디나이아인(의사 24명, 간호사 46명, 행정직원 19명)과 한국인 직원 650명으로 문을 연 국립의료원은 개원 당시 동양 최고의 병원이었다. 전후의 우리국민들에겐 싸고 좋은 진료를 받는 곳이자, 우리 의사들에겐 선진 의학을 전수받는 곳이 되었다. 이곳을 통해 스칸디나비아로 유학을 다녀온 의사들도 많았다.
이제 내년 2018년이 되면 국립의료원 출범 60년을 맞는다. 올해 2017년은 스웨덴 병원이 이 땅을 떠난 지 6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국립중앙의료원의 위상은 예전만 못하고, 시설도 낙후되었다. 그래서 2021년에는 서울시 원지동에 새 병원을 짓고 이전할 게획이다. 을지로의 지금 병원은 당초 허물 계획이었지만 역사성을 감안해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옛 직원 숙소만은 근대건축물로 보존할 예정이라 한다. 하지만 본관은 허물고 시립병원을 신축할 예정이란다. 그렇다면, 같은 시기에 완공된 이 본관은 역사적 보존 가치가 없는 것인 것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낡은 것이 불편하고 흉하고 없애야 할 것이라면 유럽의 오래된 병원들은 어떻게 그 자리에 서있는지 궁금하다. 진정 낡은 것은 건축물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시스템이다. 낡은 시스템은 새 집에 들어간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래된 것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으로 새로워진다면, 우리에게 역사는 왜 필요할까? 서울의 한 복판에 교통 흐름을 막는 저 남대문은 왜 필요한가? 유럽의 도시처럼 잘 보존된 오래된 건축물이 우리에겐 없다고 한탄하기 전에, 그나마 남아있는 역사적 건축물을 낡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허물고 새로 짓는 우리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역사는 역사가 아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본관을 허물 계획에 대해서도 다시 재고해보시길 간절히 바란다. 새 것만이 능사가 아니쟎는가?
출처 : 디아트리트 VOL.17, NO.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