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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욱의 medical trivia

클림트의 <의학> 그리고 말러

                                                                                        

박지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

신경과 전문의

<메디컬 오디세이>저자

한미수필문학상 수상(2006년, 2007년)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1 <거인>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 시카고심포니오케스트라 / 1981

 

 

비인의 좋았던 시절 La Belle Epoch       

 

 

음악가 브루크너(Anton Bruckner)가 물리학자 볼츠만(Ludwig Boltzman)에게 피아노 교습을 해주고,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는 정신적인 문제로 프로이트(Sigmund Freud)에게 상담치료를 받고, 프로이트의 스승 브로이어(Josef Breuer)2는 철학자 브렌타노(Franz Brentano)의 주치의였고, 젊은 시절 프로이트와 심리학자 아들러(Victor Adler)는 결투를 벌였으며, 아들러는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와 프로이트처럼 저명한 신경학자 마이네르트(Theodor Meynert)6의 임상진료소에서 조수노릇을 했다. 음악가 베르크(Alban Berg)는 말러 음악의 고결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레하르(Franz Lehar)의 저급한 음악의 정 반대편에는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오페레타가 있었다. 

 

1897년에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는 기존의 권위를 거부하는 젊은 예술가 집단인 비인 분리파(Secession)운동을 시작했고, 그 해에 말러는 오스트리아 음악계의 최고 자리인 비인 궁정 오페라극장(Wien Staats Oper)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1902 4월에 비인 분리파는 14회 전시회를 가졌는데 그 전시회의 테마는 바로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었다. 전시회에서는 클림트가 제작한 34미터 길이의 벽화 즉 베토벤 프리제(Beethoven Frieze)가 발표되었고, 클림트는 존경하던 말러의 얼굴을 벽화의 가장 중심되는 화면에 그려넣어두어 ‘황금 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 말러가 등장했다. 말러는 이에 호응하듯 전야제에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제 4악장을 지휘하여 젊은 예술가들을 축하해주었다. 이러한 시기를, 합스부르크가문이 지배했던 헝가리-오스트리아제국의 마지막 찬란한 햇살이 비추던 ‘비인의 좋은 시절 La Belle Epoch’이라고 부른다.

 

 

 

 

구스타프 클림트 <베토벤 프리제>1908년 중 일부

 

행복을 찾는 인간의 모습. 행복을 찾아 나서려는 황금 기사에게 기도하는 벌거벗은 남녀 그 뒤로 주시하는 여인이 있다. 기사 뒤편에는 월계관을 씌워주려는 여인의 모습.           

 

 

 

1910, 말러는 비인의 신경과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찾아가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다. 아내 알마와의 불안한 결혼생활, 그리고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통해 말러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에 시달린다는 진단을 내렸다. 다리가 불편하지도 않으면서도 다리를 절고 다녔던 말러(그의 어머니는 다리가 불편했다), 딸의 이름을 마리아로 지어준 말러(그의 어머니도 마리아였다)는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말러는 아내 알마를 10년 전 어느 파티장에서 만났다. 비인에서 가장 유명한 독신남인 말러(41)와 비인 사교계의 총아 알마(23)는 만나자 마자 불 같은 사랑에 빠져 결혼에 성공해서 비인 사교계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순탄치가 않았다. 사실 말러가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기피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불행했던 가정사가 한 몫은 했을 것이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 그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았던 섬세한 어머니, 대부분이 질병을 앓거나 죽었던 14명의 형제들, 그런 배경 속에서 말러 역시 평생을 죽음과 질병의 두려움 속에 살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도 장대한 음악 속에서 구현해내었는지 모른다.

 

 

기혼자가 된 알마는 내성적인 남편과는 달리 비인 예술계에 많은 친분을 유지했고, 덕택에 말러는 아내를 통해 많은 문화 예술인들을 소개받는다. 그 중에는 미술계의 기린아이자 알마의 연인이기도 했던 구스타프 클림트도 있었다. 말러나 클림트나 이름은 한 가지로 구스타프였지만 클림트는 말러와 많은 면에서 정반대의 캐릭터를 가졌다. 독신으로 지내면서도 18명의 사생아를 낳고, 관능적이고도 악몽을 연상시키는 그림을 그려 많은 비평가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분노에 떨게 만든 클림트와 달리, 딸 아이의 출산으로 사회 생활까지 접으며 딸 마리아와 노는 것을 좋아했던 가정적인 말러였으니 말이다. 하여간 알마를 통해 서로를 알게된 두 구스타프는 곧 서로의 예술에 경의를 표하고 정신적인 유대관계를 키웠기에 지금도 말러의 교향곡이나 베토벤 교향곡의 앨범 자켓에는 클림트의 그림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말러는 평생을 질병과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이를 이겨낼 장치로 작곡을 하며 지냈고 결국 자신이 가장 걱정하던 심장병으로 1911년에 사망했다. 알마는 몇 년 후 내연의 관계였던 유명 건축가와 결혼 후 다시 이혼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세번째 결혼을 했다. 말러는 죽어서도 먼저 간 첫 딸 마리아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했던지 지금도 딸의 무덤곁에 묻혀있다.

 

 

클림트의 <의학>

 

 

 

구스타프 클림트 <의학 Medicine> 1904년 중 일부

 

 

이 음반의 자켓 그림은 말러와 클림트의 인연을 담고있다. 그림은 클림트의 작품 <학부 회화 Faculty Paintings> <의학>의 일부이다. <의학>이 발표되었을 때 그림을 의뢰했던 비인 대학의 교수들은 집단적인 반발을 했다. 그림 속에 표현될 <의학>이 이성의 힘으로 진보되는 세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근원 모를 불안, 공포, 고통을 연상하게 하며 더구나 산모가 누드로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결국 학교에 걸리지도 못했고, 나찌가 점령했을 때는 퇴폐적인 그림으로 몰수되었고, 2차 세계대전 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CD 표지에 도렷이 보이는 인물은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건강의 여신 히게이아Hygeia이다. 히게이아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의 딸로 알려져있고 로마식으로 하면 살루스Salus이다. 히게이아의 손에 감긴 것은 뱀이고 손에 든 것은 약 접시이다. 신화적으로는 ‘치료’를 상징한다. 이 한 장의 그림 속에 클림트가 표현한 음산하기 그지 없는 의학의 한 단상은, 100년의 시간을 건너 날아와 조용히 속삭이는 것 같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늘 의문이지만 말이다.

 

 

‘거봐, 의학이 인간에게 해준게 뭐 있냐구?

 

 

2009년 봄, 서울에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클림트의 그림들이 나들이를 왔단다. 클림트의 그림 속에 숨겨진 말러와의 인연을 이해한다면 그림 속의 두 구스타프들이 들려주는 100년 전 비인의 ‘좋았던 시절 La Belle Epoch’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