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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단체

간호사 등 병의원 근무자는 예고없이 해고해도 된다?

의사협회, 별도 근로기준안 마련…산하 단체에 배포

대한의사협회가 병의원에서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 방사선사 등 의료기관 직원을 원장 직권으로 예고없이 해고할 수 있는 독소조항 등을 담은 별도의 근로기준안을 마련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 기준안은 근로계약서 작성시 사전합의 조항으로 적용될 가능성이 커 향후 고용자와 근로자 간 고용분쟁에 따른 파장이 예상된다.

특히 이같은 별도 기준안은 근로기준법과 노동관계법령에 의거해 마련됐다고는 하지만 해고와 징계부분 등 근로자의 불이익과 관련된 부분의 경우 기존 법령과 차이를 보이고 있어 법리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종사자들의 피해가 우려된다.

의사협회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의료기관 취업규칙 예시안'을 마련해 최근 시도의사회 및 대한개원의협의회 등 산하단체에 배포한 상태다.

◇취업규칙 예시안이란?=의협이 만든 취업규칙 예시안은 고용자(의원장) 및 피고용자의 권리와 의무사항을 담은 일종의 사규(社規)다. 노조가 없는 의료기관의 경우 근로자가 사측과 산별협약과 단체협약을 맺지 못하는 대신 '취업규칙'이라는 형식을 통해 규약을 맺게 되는데, 이 가이드라인을 의협이 만든 것이다. 꼭 의협이 의원의 사측으로 나서는 모양새다.

의협은 이 취업규칙이 소속 의사 회원들이 의료기관에서 직원고용과 관련한 분쟁을 미리 예방하고 직원채용, 근로계약 및 연봉계약 체결 시 도움을 주는 차원에서 마련했다고 취지를 밝히고 있다.

근무인력이 4인 미만인 곳이 대부분인 의원의 고용계약에 있어 근로기준법 적용의 사각지대인 부분을 명문화 함으로써 직원에 대한 상벌조치의 근거를 마련하고 향후 분쟁의 소지를 없애겠다는 것.

특히 통상적으로 별도의 근로계약서 작성 없이 구두(口頭)로 이뤄지고 있는 의원의 고용계약에 서면계약을 본격적으로 도입한다는 뜻도 담겨있다.

의협은 이 취업규칙을 공지하면서 "사업장에서 근로자가 준수해야 할 규율, 임금, 근로시간, 기타 근로조건 등에 대한 사항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며 "따라서 의료기관에서 직원에 대한 능동적인 인력관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즉시 해고 가능한 '독소조항'=의협의 취업규칙은 각 의원들이 고용계약시 제시하는 것으로, 근로계약서에 서명하게 되면, 취업규칙의 내용에도 동의한 것으로 간주된다. 고용과 동시에 취업규칙이 적용되는 셈이다.

그런데 그 내용 중 해고 및 징계부분이 근로자에 대한 독소조항을 담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고용자는 피고용자에 대해 사전예고 없이 해고가 불가능하지만 의협의 취업규칙에서는 가능하다. 취업규칙은 조항 대부분을 근로기준법의 형식과 내용을 빌리고 있어 근로기준법의 해고·해고의 제한·해고의 예고 등과 동일한 수준의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징계' 조항을 추가함으로써 사실상 즉시해고가 가능하도록 했다.

제42조에서는 △학력 또는 중요한 경력을 사칭하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입사한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자주 결근, 지각, 조퇴 등 근무가 불량한 경우 △이 규칙을 수차례에 걸쳐 거듭하여 위반한 경우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의료기관에 손해를 입힌 경우 △형사상 범법행위를 한 경우 △의료기관의 기밀을 누설하거나 규율질서를 문란케 한 경우 △직무상 의무를 위반하거나 또는 직무를 태만히 한 경우 △각호에 준하는 행위를 한 경우 등 징계사유를 명시했다.

또 제43조에서는 징계 수위를 견책, 출근정지, 권고사직, 징계해고 등 네가지로 구분해 놓고 42조의 징계사유에 대해 적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취업규칙에 명시된 '견책'은 훈시수준의 조치, '출근정지'는 7일간의 무급휴가, '권고사직'은 퇴직 권고와 반발시 징계해고, '징계해고'는 예고기간없는 즉시 해고 등을 각각 의미한다.

특히 징계 사유와 징계 수위간 적용관계를 명시해 놓지 않아 모든 징계사유에 대해 징계해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놨다.

근로기준법이 근로 최저기준을 정함으로써 더 이상 근로조건을 낮출 수 없도록 하고 있지만, 의협의 취업규칙은 별도의 규정을 통해 해고와 징계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는 셈이다.

또 '규정되지 않은 사항은 근로기준법 및 노동관계법령이 정하는 바를 준용한다'는 조항을 둬 이 규칙에 규정된 부분에 대해서는 해당 조항을 따르도록 하고 있다.

◇내부고발자는 가차없이 해고 가능=의협의 취업규칙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내부고발자, 즉 의료기관 기밀누설 부분에 대한 조항이다.

제21조에서는 '의료기관의 기밀을 누설하는 행위'를 금지사항으로 규정하고, 제42조에서도 '의료기관의 기밀을 누설하거나 규율질서를 문란케 한 경우'를 징계사유에 명시했다.

또한 취업규칙과 함께 첨부된 근로계약서 표본에도 "계약기간중 또는 종료 후 업무수행과 관련해 알게 된 어떠한 정보라도 타인 또는 타기관에 누설해서는 안되며, 이를 위반할 경우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못박고 있다.

즉, 내원환자의 개인 진료정보를 비롯해 건강보험 허위·부당청구, 리베이트 등 의원 내부 비리 공개 가능성까지도 차단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직원에 대해서는 '거래처로부터 사례, 증여 및 향연을 받는 행위'를 금하도록 하고 있지만, 의료기관장과 지휘·감독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단서조항도 담고 있지 않아 규정 적용의 형평성에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산별교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해마다 병원 사측과 임금 및 단체협상을 벌이는 보건의료노조의 경우 이같은 취업규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실장은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닌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독소조항"이라며 근로자로서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라는 입장을 강조했다.

이 실장은 "병원들의 경우 모든 노사에 적용되는 산별협약과 병원별로 단체협약을 맺게 되는 데 노조가 없는 병원이나 의료기관의 경우 취업규칙이나 내부규정에 따르게 된다"며 "따라서 노조가 있는 병원은 나름 교섭을 통해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지만 노조가 근로자 권리 보호의 사각지대"라고 말했다.

그는 징계부분과 관련 "상벌과 관계된 것이 인사위원회와 징계위원회가 있는데, 징계위원회는 노사 동수로 구성될 정도로 징계는 사측 입장에서도 쉬운 부분이 아니다"며 "그렇기 때문에 예고없이 직원을 해고하거나 합당하지 않은 중징계를 내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의협의 취업규칙에 대해 "의사로서 의사윤리강령도 지켜야 하지만 의사는 의원에서의 CEO"라며 "합리적인 사용자로서 책무를 다해야 하는데 실정법 이하의 기준을 강요한다면 사회적 비판을 받아야 마땅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실정법에 벗어나는 것은 '무효'=하지만 노사관계 전문가들은 아무리 취업규칙에 동의하고 근로계약을 체결했다 하더라도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보고 있다. 미국의 경우 근로계약서 상에 명시된 부분 때문에 부당해고에 대해서도 제소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실정법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하병호 노무사는 "해고의 정당성을 불문하고 해고는 30일전에 예고해 줘야하고 이 때는 고용자가 통상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며 "근로계약시 양 당사자가 합의했다 하더라도 퇴직 및 해고 기준은 실정법에 위반해서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장재훈 노무사도 "법을 위반하거나 법에 배치되는 것은 무조건 무효"라며 "내부고발자에 대한 해고는 부당해고로 판정을 받게 되고, 해고된 당사자가 복직을 원한다면 복직과 함께 위로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따라서 의료기관으로부터 이같은 취업규칙을 근거로 해고당하는 것은 부당해고에 해당하고, 이 경우 노동위원회에 신고하면 합리적인 조치를 받을 수 있다"며 "강압에 못이겨 부당한 조치에 수긍하지 말고 합리적으로 대처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의협 "문제 직원, 사전 차단용일 뿐"=의협은 취업규칙과 관련한 우려에 대해 문제가 있는 직원 고용을 막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의협 김주경 대변인은 "예전에 발생한 산부인과 신생아 학대문제의 경우 근로기준법에 의해서는 문제직원이라도 해고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문제나 분란을 일으키는 직원을 해결 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없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김 대변인은 이어 "지금까지는 동네의원들이 영세해 구멍가게 운영하듯 주먹구구로 운영해 온 만큼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며 "현재 취업규칙을 비치하고 직원들과 상의해 근로계약을 맺도록 모든 회원들한테 공고한 상태"라고 덧붙였다.

한편 보건의료노조는 의협의 취업규칙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는 성명을 발표한다는 방침이다.

메디포뉴스 제휴사 국민일보 쿠키뉴스 제공 rj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