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고령화로 인한 막대한 의료비 지출이 예상되는 가운데 건강보험 재정 고갈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정부 차원의 커뮤니티 케어(Community Care, 이하 사회적 돌봄)가 본격 추진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보다 비교적 앞선 시기에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여 커뮤니티 케어를 도입한 영국은 혹독한 긴축 정책에 따른 복지 재정 감축으로, 돌봄 서비스 이용이 필요한 사람 대다수가 돌봄을 사비로 구매하거나 가족 돌봄에 의지하고 있으며 일부는 기본 욕구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국제사회보장리뷰 2018 겨울호에 실린 '위기에 처한 영국의 사회적 돌봄' 기고문에서 영국 요크대학 사회정책연구소의 캐럴라인 글렌디닝(Caroline Glendinning) 명예교수는 심각한 위기에 처한 영국 잉글랜드의 사회적 돌봄 실태를 조명했다.
재정 적자 상황에 직면한 영국 연립정부는 부처 예산을 20%가량 감축하는 긴축재정안을 2010년에 발표했다. 이에 따라 사회적 돌봄 서비스 재정 · 공급을 책임지는 지방정부 예산이 꾸준히 삭감되면서 많은 이가 기존의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됐고, 노인 · 장애인 등에게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단체 상당수가 문을 닫았다.
2008년 영국 지방정부는 사회적 돌봄을 수급할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PB(Personal Budget, 개인 예산)를 지급하는 방식을 도입하여 소비자 선택권을 확대했다. PB는 돌봄 비용을 개인에게 현금으로 직접 지불하는 형태지만, 2014년에는 PB 예산의 29%만 직접 현금 지불 방식으로 지급했고, 47%는 지방정부가 위탁한 서비스의 비용 지불을 위해 지방정부가 보유 · 관리하는 방식으로 지급했다.
글렌디닝 교수는 "이는 소비자 선택권을 높이려는 정책이 그 목표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방정부는 전반적으로 지출을 줄여야 할 상황이어서 사회적 돌봄을 맞춤형으로 제공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며,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는 사회적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요구 수준이 매우 높으면서 자산 · 소득 수준이 낮아야 한다. 오늘날 재가돌봄서비스는 시설에 수용될 위험이 가장 높은 사람에게만 제공된다."고 설명했다.
영국은 2010~2011 · 2014~2015 회계연도 사이에 약 6조 5,300억 원의 성인 돌봄 예산을 삭감했다. 사회적 돌봄 욕구와 이를 충족하기 위한 재원 간 간극은 2019년까지 약 3조 9,7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며, 이에 따라 영국의 성인 돌봄 지출액은 GDP(국내총생산)의 0.9%로 떨어지게 된다.
2009~2010 · 2013~2014 회계연도 사이에는 △노인 전체 인구의 약 26%만이 지방정부 재정 지원으로 돌봄 서비스를 제공받았고 △같은 기간 주간 보호 서비스를 이용하는 노인 수는 3분의 1가량 감소했으며 △식사 배달 서비스 수혜자 수는 무려 61% 감소했다. △돌봄 장비 · 가정용 보조구를 지급받는 사람도 8만 3,945명이 줄어들었다.
2016년 조사에서는 65세 이상 노인의 28%가 개인 돌봄이 필요하다고 답했으나 실제 도움을 받은 노인은 12%로, 절반에 채 미치지 못했다. 오늘날 잉글랜드에서 개인 돌봄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노인은 8명 중 1명꼴이다.
2001년부터 2011년까지 가족 돌봄자 수는 영국 전역에 걸쳐 11% 증가했다. △가족 돌봄자의 48%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이 중 85%는 돌봄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했고 △75%는 돌봄이 자기 건강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개인 돌봄 △주간 보호(Day Care) △식사 배달 서비스 등 잉글랜드의 사회적 돌봄은 영리 · 자선단체가 경쟁하며 재가 돌봄 서비스의 97.5%를 제공하는 형태다. 전체 서비스의 70%는 지방정부가 구매하고, 나머지는 서비스 이용자가 사비를 들여 구매하기 때문에 서비스 제공 기관들은 지방정부 재정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긴축 정책으로 더 이상 사업을 유지하지 못해 문을 닫는 기관이 점차 늘고 있다. 지방 정부가 책정한 재가 돌봄 평균 요금은 시간당 2만 2,800원으로, 재가 돌봄 종사자 대부분은 이동 경비를 보상받지 못한다. 국가생활임금 인상 후 돌봄 제공기관에서는 인력을 고용 · 유지하기가 더 힘들어졌다. 간호직 공실률은 9%로, 정규직 부족분을 채우기 위한 임시직 · 위탁직 활용 비율은 55% 증가했다. 잉글랜드 지방정부의 70%는 돌봄 제공기관 인건비에 훈련 보상비를 책정하지 않는다.
글렌디닝 교수는 "돌봄서비스 제공 기관들은 서비스에 대한 지방정부 보상액이 현실에 미치지 못해 직원 임금을 지급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는다. 브렉시트(Brexit) 이후 단행될 이민자 · 외국인 고용 제한 정책은 돌봄 종사자 고용 및 서비스 공급 역량 · 질을 더욱 악화시키고, 서비스 제공 기관 존립을 위협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사회적 돌봄 서비스가 부족하면 병원에서 퇴원하지 못하는 사람 수도 증가하게 된다. 글렌디닝 교수는 "긴축 정책은 NHS(National Health Service, 영국 국가 보건 · 의료 서비스)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며, "예산 위기에 대응하여 사회적 돌봄 재원을 지방세인 재산세로 바꾸는 것은 잉글랜드 지역 간 빈부 격차가 커지는 현 상황에 비춰볼 때 돌봄 예산의 균형 배분 측면에서 상당한 우려를 낳는다. 즉, 사회적 돌봄의 보편적이고 평등한 서비스 개념으로부터 후퇴하는 것이다. 이는 장애 · 노령 등으로 인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공적 자금의 지원을 받는 것이 기본 시민권이라는 개념과도 맞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영국의 돌봄 예산 삭감은 오는 2020년까지 계속될 전망으로, 교수는 영국 내 돌봄 개혁이 브렉시트 위기 해결 후 다음 선거로 미뤄질 것으로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