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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욱의 medical trivia

화약에서 비아그라까지

 

박 지 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
신경과 전문의
<메디컬 오디세이> 저자
한미수필문학상 수상 (2006년, 2007년)

 

 

 

화약에서 비아그라까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갑자기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노인에게 혀 밑에 약을 밀어 넣어주는 장면이 꽤 많다. 잘 아는 것처럼 이 약은 흔히 엔지(NG)라 불리는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e)이다. 오늘은 베타차단제(β-blocker)와 함께 관상동맥질환(CHD)의 주된 치료제로 사용되는 나이트레이트(nitrate) 계열 약물의 특별한(?) 역사를 한번 알아보자.

 

 

위험한 폭약을 발명했어요! 

 

 

 

1846, 이탈리아 토리노대학교의 화학자 소브레로(Ascanio Sobrero (1812~1888))는 글리세롤(glycerol)1)을 질산(nitric acid)과 황산(sulphuric(sulfuric) acid) 화합물에 반응시켜 ‘파이로글리세린(pyroglycerin)2)이라는 강력한 액체 폭약을 발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이다. 

    

소브레로는 자신의 스승인 꼴라쥬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의 플루즈(TheophileJu- les Pelouze (1807~1867)) 교수에게, 강력하지만 다루기가 너무 힘든 폭약을 발명했다고 알리면서 이것을 살짝 혀끝으로 맛을 보았다가 몇 시간 동안이나 머리가 너무 아파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1849년에 동종요법(homeopathic remedy)3)의 신봉자였던 필라델피아의 허링(Con- stant Hering)은 두통을 일으킨다는 이 물질로 두통을 치료해보려 시도했지만, 아마도 실패했을 것이다. 소브레노의 발명과 허링의 시도로부터 니트로글리세린의 미래가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폭약(爆藥)과 의약(醫藥)의 가능성 말이다.

 

 

소브레로의 발명(發明), 노벨의 이용(利用) 

 

1850, 스웨덴 화학자이자 발명가 한 사람이 플루즈 교수에게 연수를 왔다가 소브레로의 폭약 이야기를 들었다. 소브레로가 워낙 위험성을 강조하다 보니 니트로글리세린은 지난 몇 년 동안 거의 사장되었던 물질이었지만, 거친 바이킹의 후예인 이 스웨덴 발명가는 위험한 폭약에 관심을 가졌다. 그가 바로 노벨 (Alfred Nobel (1833~1896))이다.

노벨은 플루즈로부터 화약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기술을 익혀 10년 후 고향으로 돌아가 폭약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고체 형태의 다이너마이트(dynamite)4)로 만들었고,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정작 자신의 발명품으로 성공을 거둔 노벨을 바라보던 소브레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폭발 사고로 얼굴에 깊은 상처를 입은 소브레로는 자신의 발명품이 일상적으로 사용되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물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자신이 세상에 내놓은 니트로글리세린을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극구 말리는, 모순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스승에게 보낸 편지나 저널에 실은 글들도 모두 니트로글리세린의 강력한 폭발력과 동시에 그것을 다루기가 너무 어렵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의 발명품이 ‘프랑켄슈타인’처럼 세상에 나오지 말아야 했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니트로글리세린 폭발 때 죽은 희생자들, 폭발로 남은 황폐함,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폭발의 위험성을 생각하면, 내가 그 물질의 발견자로 기억되는 것조차 부끄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자신의 폭약을 노벨이 개량하여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자, 소브레로는 한편으로는 굴욕감을, 한편으로는 부당하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이번에는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하지만 노벨도 그의 몫을 가로채어 거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공장이 폭발하여 사랑하는 동생을 잃었으니 소브레로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위험에 굴복하지 않고 노력한 결과로 안전한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노벨은 자신의 성공을 돋보이게 하려고 소브레로를 깍아내리지 않았고, 항상 소브레로가 니트로글리세린의 발견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일중독자였던 노벨은 말년에 우울증, 두통 그리고 협심증을 앓았고 결혼도 안 한 처지라 화약업으로 모은 전 재산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무엇인지 다들 알 것이다.

 

 

브런턴의 아밀 나이트라이트 머렐의 니트로글리세린 

 

토리노, 파리, 스웨덴을 거쳐 스코틀랜드로 이야기는 넘어간다. 유명한 외과의사 죠셉 리스터(Joseph Lister)가 활동하고 있던 도시 에딘버러의 왕립병원(Edinburgh Ro- yal Infirmary)에서 일하던 의사 브런턴(Lauder Brunton)은 자신도 협심증(angina pectoris) 환자였다. 괴로운 흉통을 없애기 위해 아편, 브랜디, 디기탈리스(digitalis), 클로로포름(chloroform) 등을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하지만 3~4 온스5)의 방혈(blood-letting) 요법은 통증을 약간 줄여주었는데 방혈하면 일시적으로 혈압이 내려가서 통증이 줄어드는 것으로 짐작했다.

어느 날, 동료이자 친구인 갬지(Arthur Gamgee)가 아밀 나이트라이트(amyl nitrite) 흡입 동물 실험에서 혈압이 떨어지는 효과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브런턴은 번거로운 방혈 대신에 아밀 나이트라이트를 이용한다면 흉통이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1844년 소르본느의 앙투아네 발라르(Antoine Balard)가 처음으로 합성한 아밀 나이트라이트는 두통만 일으키는 ‘골치 아픈 물질’로만 알려져 왔는데, 1865년에 리처드슨(Sir Benjamin Richardson)이 혈관 확장작용을 밝혀냈기에 갬지는 혈압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브런턴이 갬지에게서 얻은 아밀 나이트라이트를 천에 묻혀 협심증 환자에게 들이마시도록 했는데 놀랍게도 즉시 흉통이 사라졌고 몇 시간 동안이나 편해졌다. 브런턴은 니트로글리세린도 협심증 치료에 시도해보았지만 견디기 힘든 ‘두통’ 때문에 사용하기 어려웠다. 브런턴은 1867년에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웨스트민스터병원(Westminster Hospital)의 의사 머렐(William Murrel)이 니트로글리세린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 결과 아밀 나이트라이트는 10초 만에 효과가 나오지만 니트로글리세린은 작용 발현에 2~3분이 걸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5분 후에 효과가 사라지는 아밀 나이트라이트보다 훨씬 작용시간이 길어 30분이나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가장 문제가 된 부작용인 두통은 양을 줄여 사용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6~7) 결과적으로 장점이 더 많은 니트로글리세린이 아밀 나이트라이트을 신속하게 대체해 나갔다. 아울러 머렐은 이 약의 가장 효과적인 투약법이 혀밑에서(sublingual) 천천히 녹이는 것이라는 것도 발견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방법을 사용한다.

머렐의 성공은 1879년에 발표되었다. 소브레로가 니트로글리세린의 맛을 보고 두통을 느낀 지 33년 만의 일이다. 9년 뒤에 사망한 소브레로는 죽기 전에 니트로글리세린이 약으로 사용되어 자신의 소박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 노벨도 말년에 협심증을 앓았고 그 역시 니트로글리세린을 처방받았다고 편지에 남겼다.

    

심장 질환 때문에 이곳 파리에서 적어도 며칠은 더 머물게 될 것 같네. 그런데 나는 이 질병 때문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처방받았네. 이야말로 운명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의사들은 화학자나 일반인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니트로글리세린을 트리니트린이라고 부르고 있다네.8)

하지만 노벨은 두통 때문에 약은 먹지 않았고,9) 심장마비가 아닌 뇌출혈로 1896년에 사망했다.

 

 

20세기의 니트로글리세린

 

20세기가 열리자 니트로글리세린 산업이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약물 생산이 늘어나서가 아니라, 전쟁 때문이었다. 협심증으로 쓰러지는 환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멀쩡한 사람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니트로글리세린 산업이 폭발적인 활황을 맞은 것이다. 소브레로는 바로 이 점을 두려워했을 테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여성들이 후방의 화약공장에서 남자들을 대신해 일해야만 했다. 그런데 좀 별난 일이 벌어졌다. 화약을 포장하는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근로자들이 월요일만 되면 두통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두통은 하루하루 지나가면 조금씩 나아졌다가, 주말을 쉬고 월요일에 다시 출근하면 똑같이 반복되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바로 니트로글리세린 증기(vapor)가 원인이었다. 니트로글리세린의 증기 역시 브렌턴의 아밀 나이트라이트의 증기10)처럼 혈관을 확장시키는 능력을 발휘하여 여성 근로자들에게 ‘혈관 확장성 두통’을 일으킨 것이다(하지만 고혈압이었던 근로자들에게는 혈압을 내려주는 효과도 있었을 테다. 그리고 혈관 확장 효과를 가진 고혈압 치료제는 두통의 부작용이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증기에 노출되면 점차 인체가 약물에 대해 생물학적 적응력(biological adaptation)을 발휘하게 되어 두통이 스르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증기에 노출이 없는 주말을 지내면서 적응력이 사라져 월요일이 되어 다시 증기에 노출되면 어김없이 새로운 적응을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일요일에 심장발작이 많이 나타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건 또 웬일일까? 주중에는 본의 아니게 치료제를 마시고 있었던 관상동맥질환 환자들이 화약공장에 가지 않는 일요일에는 약을 단번에 끊은 것과 같은 몸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니트로글리세린을 다루는 산업 현장에서 발생한 “월요병(Monday disease)”이나 “일요일 심장마비(Sunday heart attack)”로부터 의사들은 무엇을 배워야 했을까? 같은 환자에게 니트로글리세린을 장기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면, 나중에는 환자의 몸에서 약물에 대한 저항 혹은 인체의 적응이 생겨 약이 잘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이제 아밀 나이트라이트를 완전히 대체해버린 니트로글리세린은 주사약, 설하정, 흡입제, 피부 흡수제 등의 다양한 제형으로 판매되었다. 1948년에는 이소소르비드디니트레이트(isosorbidedinitrate),11) 1951년에는 펜타에리트리톨테트라니트레이트(pentaerythritoltetranitrate), 에리트리틸테트라니트레이트(erythrityltetranitrate), 이소소르비드모노니트레이트(isosorbidemonitrate)12) 등의 약들로 출현했는데 이 모두 약효가 길어진 것들이다. 오늘날 니트로글리세린 그 자체는 협심증 환자들이 증상이 있을 때만 즉, p.r.n.으로13) 사용하는 상비약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소브레로의 발견으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니트로글리세린의 대사물질로, 체내에서 만들어지는 ()산화질소 nitric oxide (NO)가 혈관의 평활근에 작용하여 혈관을 확장시킨다는 사실이 퍼치고트(Robert F Furchgott), 이그내로(Louis J Ignarro), 머래드(Ferid Murad)와 같은 과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들은 “심혈관계에서 신경전달물질로써 기능하는 일산화질소에 대한 연구의 공로”로 199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니트로글리세린으로 성공한 협심증 환자 노벨이 사망한 지 102년 만의 일이었다. 

 

 

가문의 영광?

 

 

 

 

 

 1990년대에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Pfizer)의 연구원들은 니트로글리세린의 약리적 기전과 유사한 약물 즉, 혈관을 확장시켜 혈압을 낮추고 심장 혈류를 좋게 할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 결과 화합물 UK-92,480 , 지데나필(sidenafil)이란 관용명이 붙은 약물이 태어났다.

약물로서의 자격을 검증하기 위한 제1상 임상시험(phase I clinical trial)을 거치자 신약이 기대와 달리 협심증에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 용도 폐기될 처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특이한 부작용이 발견되어 관심을 끌었는데 그것은 엉뚱하게도 음경의 혈관이 넓혀져, 때아닌 발기(erection)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14) 이 부작용 때문에 약물을 발기부전 치료제로 개발하기로 했고, 1996년에 발기부전 치료제로 특허를, 1998년에는 FDA의 승인을 얻었다. 이듬해인 1999년 세계 최초의 먹는 발기부전 치료제로 미국시장에 시판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비아그라(Viagra)15)이다.

 

 

 

 

 

비아그라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위대한 실패의 엄청난 성공!

 

이전의 발기부전 치료라는 것은 수술을 하거나 특수한 기구를 이용하는 등 까다로운 방법들이어서 환자들의 말 못할 불편이 심했는데 비해 비아그라는 원하는 때에만 먹는 간편한 알약이었다. 환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을 수밖에!

하지만 세상은 이 약을 발기부전 치료제로만 놔두지는 않았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비아그라는 단순한 약의 이름 그 이상이 되어 일종의 최음제(aphrodisiaic)로 비아그라를 받아들인 것이다. 아니 기대한 것이다. 대중들은 이 약을 구하기 위해 아우성을 치고, 이로 인한 사회문제들이 생겨났다. 미국에서는 “비아그라 광풍(狂風)(viagra craze)”이 몰아쳤다고 했다. 

    

덕분에 2차 대전 중에 생명을 구하는 페니실린을 생산했다는 비교적 점잖은 이미지를 가졌던 미시간주 앤 아버의 화이자 사는 첫해에는 1Kg 정도 생산했지만 지금은 매년 45톤씩 생산하고,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연간 10조 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비아그라 덕분에 미국 최대의 제약회사로 발돋움했다.

이러한 엄청난 시장을 지켜보던 후발 제약회사들은 연이어 시알리스짋(tadalafil),17) 레비트라짋(vardenafil),18) 자이데나짋(udenafil),19) 엠빅스짋(mirodenafil),20) 제피드짋(avanafial)21)같은 발기부전 치료제를 시장에 쏟아내고 있다. 모두 소브레로가 두려워했고 노벨이 골치 아파 기피했던 니트로글리세린의 후손들이다.

만약 저승에서 소브레로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떤 생각이 들까? 한편으로는 심장병 환자에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발기부전의 고통에 빠진 남성들을 도와주는 인간적인 목적으로 자신의 발명품이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흐뭇해하지 않을까?

 

 

 

 

[출처]디아트리트 VOL.12, N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