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1960년대를 배경으로 자존심 대결을 벌인 두 라이벌 회사의 이야기를 다른 영화 <포드와 페라리>를 보았다.
그 영화를 보고서야, ‘엔쪼’가 무엇인지 처음
알았다. 페라리의 설립자인 엔쪼 페라리(Enzo
Anselmo Giuseppe Maria Ferrari;1898~1988)의 이름이었다. 더하여
페라리가 아니고 “페라아~리”로 발음한다는 것을, 페라리가 가문의 성(姓)이란 걸 알았다. 그러고
보니 포드, 크라이슬러, 벤츠, 토요타, 혼다, 람보르기니, 마세라티, 롤스와 로이스, 포르셰, …모두 사람의 성에서 따온 브랜드네. 그렇게 치면 우리 자동차 브랜드조
정, 김, 이, 최, … 이렇게 되었어야 했을까?
엔쪼 페라리는 원래 밀라노에 있는 자동차 제조사 알파
로메오(Alfa Romeo; 고급 스포츠카를
생산하는 브랜드이지만 1911년 이후로는 카 레이싱에도 진출)의
테스트 드라이버였다. 하지만 동료 중에 자신보다 기량이 더 나은 드라이버가 있어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운전대에서 손을 뺀다. 대신 알파 로메오의 레이싱을 관리하는 스쿠데리아 페라리(Scuderia Ferrari; 지금도 건재한 페라리의 카레이싱 팀)를
세웠다.
엔쪼는 종종 자신이 직접 핸들을 잡고 레이싱에 출전하기도
했지만 결혼 10년 만에 아들 알프레도 ‘디노’(Alfredo Ferrari; 1932–1956)가 태어나자 자신의 못 다 이룬 꿈을 아들에게 넘기기로 결심하고(독일제 벤츠를 이기는 것이었다) 핸들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하지만 디노는 건강하게 자라지 못했다. 나중에는 아예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건강을 감안해서
레이서가 아닌 회사의 후계자로 키우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디노는 스위스로 가서 자동차를 공부한다.
한편 알파 로메오와 결별한 페라리는 1950년에 열린 제1회 F1 경주에
참가했고 이듬 해에 우승한다. 그리고 명성을 이용해 일반인들을 위한 스포츠카를 개발하여 판매하는 사업도
성공한다. 하지만 아들은 상황이 안 좋아졌다. 근력이 약해지고
체중이 빠져 2년 만에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귀국한 디노는 페라리에 입사했고 엔진 개발 팀에서 일한다. 그가 개발에 참여한 엔진은 F2머신을 거쳐 나중에는 F1머신에도 장착되지만 디노는 그 순간을 볼 수는 없었다. 24세의
나이에, 뒤시엔느 근이양증(Duchenne muscular dystrophy)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귀욤 뒤시엔느(Guillaume-Benjamin-Amand
Duchenne (de Boulogne);1806~1875)은 1806년에
프랑스의 북서부, 영국 해협에 면한 불로뉴-쉬르-메르(Boulogne-sur-Mer)에서 나폴레옹 군대에
복무했던 해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일종의 숙적 영국과 면한 접적(接敵) 지역이자 최전방이자 깡촌이었다.
이 아버지도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커 자신처럼 뱃사람이나
어부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의사를 꿈꾸는 아들은 19세에
대학을 졸업한 후 무작정 상경한다. 파리에서 라엔넥(René-Théophile-Hyacinthe Laënnec)과 뒤피트렝(Guillaume Dupuytren)같은 유명한 의사들
문하에서 의술을 배웠다.
파리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그는 아버지가 죽은 후 귀향하여
개업한다. 결혼하여 아들도 얻었지만 아내는 산욕열로 목숨을, 아들은
처가에 빼앗기고 만다. 고향 땅에서도 정착이 수월하지 않았던지 5년
만에 파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파리에서도 그를 반겨 맞아주는 곳은 없었다. 번듯한 직장을 구하진 못하고 임시직, 비정규직을 전전한다. 정식 의사도 아니어서 주변의 멸시도 받았지만 언제나 연구하는 자세를 잃지 않고 귀중한 연구를 많이 남긴다. 그의 주 관심사는 전기신경학과 근육병이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지난한 그의 삶도 이제 해피엔딩이 되는 것 같았다. 어려서 생이별을
했던, 처가에 빼앗겼던 아들을 다시 만난 것이다. 아들은
의사 더구나, 자신처럼 신경과의사로 나타나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장티푸스는 아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잠깐의 빛나는 행복마저 신기루처럼 사라지자 뒤시엔느는
낙담했고 심한 우울증의 수렁에 빠져 헤어나질 못한다. 그리고 쓸쓸히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다. 69세였다. 하지만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아직 움직여지는 손으로
자신의 마비 진행 사항을 기록으로 남겼다.
살아서는 무시당하고 인정받지도 못하는 떠돌이 의사였지만
그의 이름은 근육병에도 전기생리학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파리 살페트리에 병원에는 그를 기념하는 흉상이
있다.
다시 디노에게 돌아가자.
뒤시엔느근이양증은 성염색체성 열성 유전 방식으로 대물림되며 보통 25세 정도 밖에 살지
못했다. 디노는 24세에 죽었고 뒤시엔느 타입인지 베커(Becker) 타입인지는 논란이 있다.
엔쪼는 요절한 아들을 기리기 위해 추모하는 차를 만들어
‘디노 페라리’로 명명한다.
‘디노’에는 디노가 개발에 참여한 V6엔진이
탑재되었다. 또한 밀라노대학 의학부에 디노 페라리 센터 연구소(Centro Dino Ferrari,
Università
degli Studi di Milano) 설립을 지원했다. 이 곳은 근위축 같은 난치병 연구를 한다.
엔쪼와 로라는 백년해로를 했다. 하지만 로라가 죽은 후 엔쪼의 혼외자인 삐에로(Piero Ferrari)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 삐에로는 현재 페라리의 부회장이다. 당연히 근이양증에 걸리지 않았다.
출처: 디아트리트 VOL. 21 NO.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