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민씨(가명·여·27)는 최근 급속하게 살이 쪄 지난달 초 대구시 수성구의 한 내과를 찾아 의사에게 식욕억제제를 처방해 줄 것을 요구했다. 병원은 김씨의 뜻에 따라 처방전을 내주었다. 약국에서 이 약을 구입한 김씨는 복용 2주째가 지나면서 어지러움증과 구토로 인해 결국 약 먹는 것을 포기했고, 5㎏가량 빠진 몸무게는 2주 만에 원상복귀됐다.
인터넷 중고물품 판매사이트. "중국에서는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향정신성 식욕억제제입니다. 일반 병원 등에서 처방받는 제품과 효과면에서 차이가 없고요, 대신 처방전이 필요없습니다. 저도 2개월간 복용했는데, 5㎏ 체중 감량에 성공했어요. 더 이상 체중 감량이 필요없어 남아 있는 100정을 5만원에 판매할까 합니다. 관심있으시면 010-××××-××××로 문자 주세요."
#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마약성분
최근 먹는 산소로 알려진 식욕억제제가 성인 여성과 청소년들 사이에서 오·남용되고 있다.
마약 성분이 포함돼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된 이들 약품은 유통과정에서의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지만 당국은 실태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대구지역에서 비만클리닉을 운영하는 개인의원 상당수는 고객들에게 식욕억제제를 처방해 주고 있다. 다른 다이어트 방법에 비해 단기간에 체중 감량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일부 개인의원은 청소년들에게도 이 약을 처방하고 있으며,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제시한 4주 미만 처방 규정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 약국 역시 처방전을 소지한 고객이 요구할 경우 언제든지 이 약을 팔고 있다.
향정신성 식욕억제제를 5개월간 복용해 15㎏ 감량했다는 최모씨(여·23)는 "처음에는 성형외과에서 D제품을 2개월치 처방받았고, 내과에서 S제품(1개월), 지금은 정형외과에서 L제품을 처방받아 복용 중"이라며 "다이어트를 자주하는 친구들 대부분도 향정신성 식욕억제제를 병원에서 한 번 이상 처방받아 구입했다"고 덧붙였다. 대구시 달서구의 한 약사는 "처방전만 있으면 언제든지 향정신성 식욕억제제를 팔 수 있으며, 판매 후 향정신성 의약품 관리대장에 기록만 하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국내 유명 포털사이트의 중고물품판매사이트와 다이어트 관련 카페에서는 안전성이 확보된제품이라며 향정신성 식욕억제제를 판매하고 있다.
이처럼 향정신성 식욕억제제가 오·남용되고 있는 데는 개인의원들의 생존 경쟁이 심해지면서 '의료 블루오션' 가운데 하나인 비만클리닉이 난립, 무분별하게 처방하는 사례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또 중국에서 대량 밀수된 향정신성 식욕억제제가 대형 포털 사이트를 통해 대량 유통되고 있는 탓도 있다.
# 유통과정 관리부실
향정신성 의약품이 비급여의약품으로 분류돼, 처방과 투약에 대한 정보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신고되지 않는 점도 이를 부추겼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당국은 이들 약품의 유통량은 물론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오·남용을 막기 위해서는 이들 약품이 신고될 수 있도록 코드를 부여하고, 국민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향정신성 의약품의 부작용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처방 형태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는 지적이 의료계 안팎에서 일고 있다.
강아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사무국장은 "미국이나 유럽처럼 오·남용 위험성이 높은 약물을 처방할 때 사용서를 배부하는 방식을 채택할 필요가 있으며, 학교나 가정에서도 과도한 다이어트의 문제점과 올바른 건강관리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혈압상승·정신이상 등 부작용…식욕억제제 오·남용
국내에서 판매되는 향정신성 식욕억제제는 펜디메트라진, 펜터민, 염산디에칠프로, 피온제제, 마진돌 등이 주성분이다.
이들 성분이 포함된 약은 마약류(향정신성의약품)로 뇌에 작용해 포만감을 증가시키는 반면 식욕을 억제한다. 그러나 오·남용할 경우 혈압상승·가슴통증·불안감·현기증·불면증·두통·구토·어지러움증·떨림·메슥거림·정신이상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드물게 발생하지만 치명적인 판막성 심질환이나 원발성 폐동맥성 고혈압의 위험이 있다고 전문의들은 경고하고 있다.
경북대 병원 윤창호 교수(가정의학과)는 "향정신성 식욕억제제의 경우 현재 미국FDA에 승인을 받은 제품이 단 2종류뿐"이라며 "대학병원에서는 고도비만자에 대해서만 철저한 검진을 거쳐, 선별적으로 식욕억제제를 처방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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