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필수의료 혁신 전략에 대해 대한병원의사협의회에서 우려 섞인 의견을 제시했다.
오늘날 의료의 문제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필수의료’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의대정원을 늘리는 이유도 필수의료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지난주 의대정원 확대에 대한 논란이 불거진 와중, 정부는 19일 ‘필수의료 혁신 전략’을 발표했다. 올해 1월에 발표했던 ‘필수의료 지원대책’ 10대 주요 과제에서 좀 더 나아가, 수행해야 할 핵심 과제를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필수의료’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며, 정책의 우선순위와 각 정책에 대한 평가도 다를 수 있다. 정부와 의료계는 필수의료를 살려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동의하지만, 의대정원 확대 등 세부적인 부분에서 여러 차례 대립하는 입장을 보여왔다.
대한병원의사협의회(회장 주신구, 이하 병의협)는 10월 23일 보도자료를 통해 “의대 정원 이슈를 희석시키기 위해 급조된 계획처럼 보였다”며 정부의 혁신 전략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병의협은 무려 9개의 문단, 11쪽에 달하는 자료의 서론에서 “정부가 발표한 필수의료 혁신 전략의 내용에서 잘못된 부분을 밝히고, 대한민국 의료 정상화를 위해 정부가 취해야 할 정책 방향에 대해 밝히고자 한다”고 말했다.
병의협이 제시한 ‘의료 현장에서 우려하는 지점은 무엇이며, 어떤 부분이 정책에서 보완돼야 하는지’를 짚어봤다.
병의협은 먼저 필수의료의 정체와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병의협은 “정부가 생각하는 필수의료와 국민이 생각하는 필수의료가 다를 수 있고, 의료는 속성상 필수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필수의료 살리기 대책을 마련할 것이 아니라 의료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국립대병원에 대한 지원 강화와 권한 강화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정부의 혁신 전략 핵심 과제는 ▲국립대병원 역할 강화를 통한 전달체계 혁신, ▲의사 수 확대와 함께 지역·필수의료 인력 유입 촉진, ▲서울대병원, 국립중앙의료원, 국립암센터를 국가중앙의료 네트워크로 연결 등이다.
특히 국립대병원 소관을 교육부에서 보건복지부로 변경하고, 보건의료정책과 긴밀 연계해 진료·연구·교육 등 균형적·획기적 발전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병의협은 “국립대병원 육성 및 권한 강화 정책은 오히려 심각한 부작용만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국립대병원의 규모가 무리하게 커지면 해당 지역에서 환자와 의료인력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역할을 해, 지역 내 1,2차 의료기관의 붕괴가 이어지고 환자의 수도권 쏠림이 촉진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사실상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이 되는 국립대병원이 마음껏 민간 의료기관을 컨트롤하는 관치의료 시스템이 공고해지고, 민간 의료기관의 자유가 사실상 박탈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지방 국립대병원을 수도권 대형병원 수준으로 만든다는 단순한 사고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지역 의료 시스템의 위기를 만들어낸 근본 원인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국립대병원의 역할 확대와 함께 1,2차 의료기관과 협력 네트워크를 확대하겠다고 밝혔으므로, 병의협이 제기한 우려를 불식시킬 세밀한 정책 추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병의협은 또한 ‘현실성 없는 필수의료 분야 R&D 대책’을 지적하며 “국립대병원에 산학협력단이 설치돼도 의료 분야 연구 환경 자체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R&D 투자가 성과를 낼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매우 낮다”고 말했다.
병의협은 “예시로 든 하버드의대의 사례는 약 1.2만 명 규모의 임상 병행 교수가 교육병원 연구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으며, 저수가와 국가 주도 단일 공보험 체제의 의료 시스템의 대대적인 개혁이 없이는 R&D 투자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지적했다.
의대 정원 증원을 전제로 추진되는 의료 인력 확충 대책에 대해서도 반발을 표했다. 병의협은 “의대 정원 확대가 필요한 이유로 의사 수가 OECD 최하위 수준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의료 이용 측면 지표에서 대한민국은 의사가 넘쳐나는 국가다. 이미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의료 이용량과 접근성으로 빠르게 의료비가 증가하고 있는데, 의사 증가로 인한 재정을 정부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도 지방의대를 중심으로 부실교육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 정원 증가는 문제를 심화시킬 것이며, 의대정원이 확대돼도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문제가 더욱 커질 것”이라며 “정부는 왜곡된 통계와 신념에 사로잡힌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말라”고 지적했다.
환자의 의료기관 선택권 제한 없이 의료전달체계를 정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병의협은 “정부가 제시한 의뢰 및 회송 대책의 1~2만원 수가 인상 수준으로는 환자들의 수도권 대형병원 집중화를 막을 수 없다. 의뢰를 하는 의료기관 입장에서는 신뢰관계 유지를 위해 환자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국민을 설득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병의협은 정부가 인적협력 확대 목적으로 제시한 ▲365일 의료기관 순환 당직제와 ▲국립대병원의 지방의료원 출장 진료 활성화, 의료인력 확보 정책인 ▲비수도권 전공의 배정 비율 증가 및 ▲의료기관 전문의 고용 기준 강화 및 인건비 지원 계획에 대해서도 실효성을 의심하며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병의협은 “과도한 규제를 통해 의료기관을 압박하는 정책으로는 절대로 필수의료와 지역의료를 살려낼 수 없다. 전문의 고용 기준을 강화하며 정부가 현실적인 인건비 금액 지원을 기대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강제적인 방식은 의료기관들에 경영 부담을 안기고, 최소 기준에만 맞추는 식으로 의료기관들이 적응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필수의료 분야의 수익성을 높이고, 의료 분쟁에 대한 부담을 경감시켜야 하며, 이런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한 보험 제도와 수가 제도를 포함한 의료 시스템의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한편, 비수도권 전공의 배치와 관련해서도 의견 대립이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지역의료 살리기를 위해 비수도권 전공의 배정 비율을 내년부터 5:5 수준으로 증가시키려는 입장이고, 대한전공의협의회와 학회들은 수도권에서도 전공의가 부족하고 지역 교육 환경이 미비돼 있어 현실성이 떨어진다며, 일방적인 강행을 반대하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병의협은 “필수의료 분야 기피의 가장 큰 이유는 의료 분쟁 등으로 인한 배상 책임이나 형사처벌이다. 필수의료 붕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의료 분쟁에서 의료인들의 법적 부담을 완화시켜줘야 한다”며 정부의 의료인 법적 부담 완화 정책의 일관된 추진을 요구했다.
병의협은 이번 발표에 대해 “필수의료 지원대책의 수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고, 실효성 없는 대책과 민간 의료기관을 억제하는 규제책들이 담겨 있었다”며, “의대정원 늘리기라는 답을 정해놓고 정책을 짜 맞추는 행태를 중단하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다 근본적인 의료 정상화 대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부가 꾸준히 필수의료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건강보험 종합대책에서 대안적 지불 제도를 확대하려고 하는 등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도 나서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의료계는 의료 현장의 우려와 의견을 반영해 더욱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이 추진되기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