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사람의 통증을 없애는 양키의 마술이다.”
- 19세기 영국 외과의사 리스턴(Robert Liston; 1794~1847)
모튼의 마취와 웨렌의 집도로 성공한 수술은 굳이 검증할 필요도 없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었으니까. 환자는 편히 잠들었고 의사는 통증 걱정없이 수술했으니까. 이보다 더 확실한 마취제의 증거가 또 있을까?
현대 의학의 개가인 마취법은 대학의 교수나 연구실의 과학자들이 개발한 것이 아니었다. 통증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끔찍한 비명을 들어야 했던 진료 일선의 (치과)의사들이 해낸 일이다. 당연히 엄청난 명예와 그에 따른 보상이 ‘마취의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자신을 마취의 진짜 아버지로 주장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로 처음에는 모튼이 아버지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튼 이전에 웰스가 있었다. 웰스는 모튼이 자신을 배신하고 아이디어까지 도용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참지 않고 자신이 진짜 아버지라고 나섰다. 모튼은 그 정도는 예상한 듯 재빨리 ‘레테온’으로 특허를 받았다. 특허가 난 마당에 웰스도 어찌할 수 없지 않을까? 웰스는 아무런 인정도 못받고 2년 후에 정신병원에서 혹은 클로로포름으로 자살했다고도 전한다. 불과 34세였다(1848년).
하지만 모튼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바로 잭슨이었다. 자신이 웰스를 도우며 모든 걸 알게 되었듯 이 과정을 잭슨도 자신을 지켜보았으니까. 잭슨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인물이었다. 모튼에게 특허 이익의 10퍼센트를 내놓으라고 물고 늘어졌다. 이렇게 에테르를 두고 웰스, 모튼, 잭슨이 이전투구를 벌리던 중 웰스가 세상을 떠나고, 레테온의 정체가 에테르에 향료를 넣고 색을 입힌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특허는 취소되었다.
하지만 모튼은 포기하지 않았다. 의회가 주는 특별 보상금이라도 받기 위해서 지저분한 싸움을 계속했다. 로비를 하고, 증인을 매수하고, 웰스의 미망인을 꼬드겼다. 하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에테르 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는 명성마저 잃었고, 노숙자 신세로 거리를 배회하다가 차에 치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에테르 돔의 성공 22년 만인 1868년이었고 그의 나이 49세였다(1868년). 잭슨도 이 싸움 때문에 삶을 잃었다. 이런저런 병에 걸리고 정신병 마저 앓다가 보호시설에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1880년).
모튼의 성공에 깜짝 놀라 롱도 나섰다(잭슨이 부추겼다). 이미 7년 전부터 무통 수술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에테르를 두고 벌어진 지저분한 상호비방과 소송전의 악다구니를 보고 롱은 손을 떼고 본업에 충실했다. 63세에 에테르 무통 분만으로 아기를 받은 후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1878년).
이렇게 ‘마취의 아버지’들이 세상을 모두 떠나버리자 마취법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취는 사용료 지불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되었다.
하지만 사소한(?) 감정 싸움은 여진처럼 남았다. 미국 의학회는 웰즈를 “마취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1870년). 보스턴 시민들은 모튼의 묘비에 ‘마취제의 발견자이자 발명자’라고 새겼다. 미국 의회는 롱을 ‘최초로 에테르 마취를 도입한 사람’으로 공식 발표했다(1916년).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정리하면 좋겠다. 롱은 에테르 마취를 발견했고, 웰스는 아산화질소 무통 ‘발치(拔齒)’를 개발했고(비록 공개 시연에서는 실패했지만), 모튼은 에테르 마취를 개발하고 논문으로 쓴 사람이라고. 그리고 보스턴은 현대 마취의 탄생지라고.
한편, 메사츄세츠종합병원은 매년 10월 16일은 ‘에테르의 날’로 기리고 있다. 롱, 웰스, 모튼. 마취의 아버지가 누구든 상관없이, 1846년 10월 16일에 이곳에서, 이 병원의 외과의사인 워렌의 집도로 수술을 성공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 수술장은 ‘에테르 돔(Ether Dome)’이란 고색창연한 이름의 사적지가 되었다. 마취를 이용한 수술이야 말로 미국이, 더구나 하버드의 외과 의사가 의학사에 남긴 가장 굵직한 업적이자, 양키들의 발명품이니까.
런던에서 리스턴이 에테르로 거둔 ‘마술(魔術 아니고 痲術)’은 곧 에딘버러으로 전해져 산과의사 제임스 심슨(James Y Simpson; 1811~1870)은 1847년 1월부터 ‘에테르’ 무통 분만을 시작했다. 하지만 에테르의 높은 인화성과 폭발 위험성은 언제나 의사들의 근심거리였다. 산모나 환자들도 에테르의 역한 냄새를 싫어했다. 심슨은 조수들과 함께 더 나은 마취제를 찾기 위해 다양한 화학물질의 마취 효과를 시험했고, 마침내 클로로포름(chloroform)을 찾았다.
클로로포름의 마취 효과는 에테르보다 더 나았고, 역한 냄새도 없으며, 안전하게 쓸 수 있었다. 심슨은 1847년 11월부터 ‘클로로포름’ 무통 분만을 시작했고 곧 외과 수술에도 클로로포름 마취를 했다.
심슨의 무통 분만은 여성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세력이 있었다. 여성의 산고(産苦)는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저지른 원죄에 대한 죗값이거늘, 의사가 약으로 없앤다면 신의 섭리를 거스른다며 종교계가 반발했다. 심슨은 신중하고도 차분하게 대응했다. <출산과 수술에서 마취제 사용을 반대하는 종교적 의견에 대한 대답(1849년)>에서 역시 성서에는 하느님이 아담을 먼저 ‘잠들게’한 다음 갈비뼈를 빼낸 이야기도 나온다고 밝혔다. 그리고 1796년에 도입된 종두법도 처음에는 ‘동물의 몸에서 난 것(백신)’을 사람에게 주입한다며 신의 섭리에 반한다는 맹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누구나 문제없이 받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리고 통증을 잠재우려고 ‘먹는’ 아편은 문제를 삼지 않으면서 같은 목적으로 ‘들이 마시는’ 클로로포름은 왜 문제가 되는가 따졌다.
결정적으로 1853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출산(레오폴드 왕자)할 때 주치의인 존 스노(John Snow; 1813~1853)와 상의하여 심슨식 클로로포름 무통분만을 받았다. 만족한 여왕은 1857년 출산(베아트리체 공주)때도 무통 분만을 했다(총 9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 뿐 아니라 프로이센으로 시집간 딸 빅토리아 공주가 아기를 낳을 때(185년)도 친정 어머니로서 무통분만을 받도록 조언했다.
무통 분만의 혜택을 받은 여왕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심슨에게 ‘통증을 정복한 자’라는 글자가 새겨진 문장과 함께 작위까지 내렸다(1866년). 여왕의 적극적인 지지에 대해 더 이상 누가 왈가왈부할 수 있을까? 이후로 클로로포름 마취는 제자리를 잡았다.
신탁(神託), oracle), 신의 뜻을 매개자를 통해 듣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신탁은 아폴론의 텔포이(Delphoi)신탁이다. 신화 속 이야기만 아니고 4세기까지 무려 2,000년 동안 여기서 신탁이 있었다.
아폴론의 신탁은 거대한 뱀 퓌톤(Python)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퓌톤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Gaea)의 자식으로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었다. 퓌톤은 델포이 땅의 갈라진 ‘틈’속에 사는데, 한 번씩 땅으로 올라와 인간들에게 미래를 예언해주었다. 아폴론은 퓌톤을 죽이고 그 예언력을 얻었다. 아폴론은 퓌톤이 살던 델포이에 자신의 사원을 세운 후, 퓌톤의 아내 퓌티아(Phytia)를 여사제로 삼아 그녀를 통해 인간에게 신탁을 내렸다.
미래가 궁금한 인간들이 델포이에 가면 퓌티아는 땅의 갈라진 틈으로 올라오는 ‘증기’를 마신 채 횡설수설하는 소리만 들어야 했다. 그래서 해석은 자기 나름대로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델포이의 신탁은 난해하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왜 퓌티아는 횡설수설했을까? 지질학자들은 땅의 갈라진 틈으로 올라온 에틸렌(ethylene) 증기가 퓌티아를 몽환 상태로 만들었다고 추정했다. 퓌티아를 홀린 에틸렌은 20세기 마취 역사를 여는 첫 마취제가 되었다.
델포이의 에틸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엉뚱한 틈새를 뚫고 나왔다. 20세기 초의 미국 화훼업자들은 온실에서 키우는 카네이션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식물학자들에게 문제 해결을 부탁한다. 시카고 대학교의 윌리엄 크로커(William Crocker)와 리 나이트(Lee Knight)은 온실의 어둠을 밝힌 에틸렌 가스등(燈)에서 새어 나온 에틸렌을 원인으로 밝혔다. 이를 계기로 1930년대에 에틸렌과 식물의 생장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져 에틸렌이 식물이 만드는 생장호르몬이자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밝혀졌다.
에틸렌이 식물에 영향을 준다면 온실에서 일하는 사람은 괜찮을까? 팀의 동료인 아르노 럭하트(Arno Luckhardt)가 먼저 동물에게 에틸렌을 쐬는 연구를 했는데, 독성은 없어도 동물을 재우는 효과를 발견했다. 동물을 재우면 사람에겐 마취제로 쓸 기능성이 보였다. 하지만 그가 이 사실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849년에 토머스 누멜리(Thomas Numely)가 에틸렌을 마취제로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하지만 효과는 좋았지만 부작용으로 사람 목숨을 잃은 사고가 있었다. 이후로 누멜리는 연구를 중단했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연구가 필요했다.
시카고 팀은 5년 동안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과 연구를 진행했고, 1923년에 에틸렌 마취제가 기존의 마취제(에테르나 클로로포름)보다 더 낫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환자는 편하게 잠들고, 수술 후에도 빨리 깨어나며, 마취 중에도 무탈했다. 같은 해에 토론토종합병원의 마취의사 이슨 브라운(Easson Brown)도 에틸렌 마취제의 효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인화성이 큰 에틸렌은 에테르처럼 폭발 위험성이 문제였고, 1950년대에 새로운 흡입 마취제가 등장하자 빠른 속도로 퇴출되었다.
에틸렌 연구는 시카고에서 시작했지만, 토론토에서도 열성적으로 이루어졌다. 토론토에서는 임상은 물론 약리학 교실에서도 에틸렌을 연구했다. 토론토대학교의 약리학자 헨더슨(Velyien Henderson)은 에틸렌과 화학적 구조가 닮은 프로필렌(propylene)의 마취 효과를 발견했다. 그런데 철제 탱크에 압축 보관한 프로필렌은 심장에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그러자 헨더슨도 프로필렌 연구를 중단했다.
몇 년이 흘러 헨더슨의 팀에 화학자 죠지 루카스(Geoge Lucas)가 합류해서 프로필렌의 불순물의 정체를 사이클로프로판으로 밝혔다. 1928년 11월에 헨더슨은 사이클로프로판을 합성해 고양이에게 시험을 했는데 독성은 없었고 마취 효과만 나온 것을 관찰했다(불순물은 사이클로프로판이 아닌 헥센(hexenes)이었다). 루카스의 연구는 틀렸지만 운이 좋게도 새로운 마취제를 발견했다.
사이클로프로판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가 즉각 시작되었다. 1년 후 브라운(에틸렌 가스를 연구했던 마취과 의사로 토론토종합병원에서 근무)이 헨더슨을 안전하게 마취시켰다. 처음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성공한 것이다. 이 무렵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던 프레데릭 밴팅(Frederick Banting. 인슐린을 발견하여 1923년 노벨상을 받은 의사)도 브라운에게 마취를 당했다. 사이클로프로판의 효능과 안전에 확신을 가진 브라운은 연구 결과를 캐나다의사협회에 보고했지만 병원 당국은 환자에게 사이클로프로판 사용을 금지했다.
브라운은 포기하지 않고 위스콘신대학의 월터(Ralph Walter)에게 임상 시험을 부탁했고, 1934년에 괜찮은 흡입 마취제로 검증 받았다. 사이클로프로판은 1980년대까지 널리 쓰였다.
에테르로 클로로포름도 모두 우연히 발견된 마취제였다. 하지만 20세기기가 되자 화학(제약)산업이 발전하면서 더 이상 우연에 기대지 않았다. 화학자나 약리학자들은 이미 약효가 검증된 약들의 화학 구조를 이제 손바닥 보듯 들여다볼 수 있었기에 화학 구조를 응용해 이런저런 약물을 맞춤 개발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촌시 리크(Chauncey Leake)는 에테르와 에틸렌의 화학 구조를 겸비한 화합물이라면 이상적인 흡입 마취제가 될 것으로 여겼다. 이렇게 찾아낸 화합물이 비닐 에테르로 1930년에 임상에 도입했다.
비닐 에테르는 에테르에 비해 수술 후에 빨리 깨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빠르고 깊이 마취에 빠지는 것과 장시간 수술에 사용하면 간 독성이 있어 1950년대에 새로운 마취제들이 등장하자 빠르게 퇴출되고 말았다.
1940년 런던 화학자 차머스(M Charmers)는 공업용제나 상처 세척제로 널리 쓰이는 트리클로로에틸렌의 마취 효과를 발견했다. 하지만 트리클로로에틸렌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만큼 유독한 물질이었는데 트리클로로에틸렌의 유독성은 함께 섞여있던 포스겐(phosgene; 제1차 세계대전 때 화학무기로 사용) 때문으로 밝혀지자 임상 시험을 거쳐 사람에게 쓰기 시작했다.
기존의 흡입 마취제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런 꺼림칙한 물질을 마취제로 쓴 이유는 클로로포름보다 간에 덜 해롭고, 에테르보다 호흡기 자극 증상이나 인화성이 없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이런저런 부작용, 늦은 마취 유도 효과 때문에 1950년대에 새로운 마취제가 등장하자 빠른 속도로 퇴출되었다.
하지만 분만 시에 산모가 직접 마취 강도를 조절하는 자가 흡입 마취제로는 한동안 사용되었는데, 그 태아 독성과 산모의 발암성 1980년대에 주요 선진국에서는 모두 퇴출되었다. 지금은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 금속, 섬유 공업계에서는 세척제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종종 유해성 때문에 지면을 장식하는 산업 재해 물질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1930년 초,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는 계열사인 냉장고 회사에서 쓸 냉매(冷媒) 개발을 추진한다. 당시에 널리 쓰인 암모니아나 프로판 가스는 누출되면 질식사고나 폭발 사고를 일으켰기에 안전하고도 효과적인 신냉매 개발을 화학자 토마스 미즐리(Thomas Midgley)에게 맡겼다. 그는 앨버트 헨레(Albert Henne)와 함께, 할로겐족(블소, 염소, 브롬, 요오드 등) 원소들을 주목했다. 상온에서도 쉽게 증발하므로(증발열을 빼앗아 주변을 냉각시킨다) 냉매로 쓰기 좋았지만 이 역시 독성이 문제였다. 미즐리는 염소(chlorine)나 불소(fluorine)를 탄화수소에 묶어 상당히 안정적인 화합물을 만들었다. 이렇게 ‘수소불화탄소(Hydrofluorocarbons;HFC)’ 화합물이 탄생했다. 우리는 프레온(Freon)으로 부른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수소불화탄소 화학은 새삼 각광을 받았다. 핵폭탄의 원료로 쓸 우라늄 동위원소를 추출할 때 수소불화탄소 화합물이 냉매로 쓰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전쟁 동안 수많은 화합물이 개발되었고 전쟁이 끝나자 46종에 이르는 이들 화합물들을 신약으로 개발할 탐색을 시작했다. 그 중 브롬(bromide)이 함유된 불화탄소가 에테르나 클로로포름보다 더 안전한 마취제가 될 싹수가 보였다. 미국과 영국은 각각 별도로 연구 개발에 나섰는데, 먼저 미국 연구진이 에테르보다는 인화성이 약한 플로옥센(fluoxene)을 개발했다.
영국에서는 찰스 서클링(Charles Suckling)이 적당한 휘발성, 낮은 인화성, 들이마시기에 좋고, 마취 효과도 좋은 물질을 찾은 후 3년 간의 임상 시험을 거쳐 1956년에 내놓았다. 환자들은 부드럽게 취하고, 깔끔하게 깨어나며, 수술 중에도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할로탄(halothane)이다.
할로탄의 등장은 흡입 마취제의 판도를 엎었다. 신제품이던 플로옥센은 힘을 쓰지도 못했고, 에테르, 비닐 에테르, 사이클로프로판은 설 자리를 빼앗겼다. 흡입 마취계를 단숨에 평정한 것이다. 할로탄은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흡입 마취제로 자리 잡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할로탄도 1990년대가 되자 문제가 드러났다. 재 마취를 하면 간독성을 보였다. 그러자 로스 터렐(Ross Terrell)은 간독성이 없는 흡입 마취제인 데스플루란(desflurane, 1987년), 엔플루란(enflurane, 1963년), 이소플루란(isoflurane, 1970년), 세보플루란(sevoflurane, 1975년)을 세상에 내보냈다. 오늘날 가장 많이 쓰는 세보플루란은 이런 오랜 역사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마취술이 도입되자 외과의사들은 환자의 고통 때문에 서둘러 수술을 끝내야 하는 부담이 없어졌다. 30초 만에 다리를 절단하던 리스턴(Robert Liston)의 날랜 손놀림도 이제 큰 의미가 없어졌다. 오히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려운 수술이 가능해져 금단의 영역이었던 흉강과 복강이 외과의사들의 칼끝에 열렸다. 하지만 아직 감염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외과의사 리스터(Joseph Lister)가 해결해주어야 했다. 20년이 더 걸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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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디아트리트 VOL. 18 NO.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