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에 모스크바의 외과의사 유딘(Sergei Sergeevich Yudin; 1891~1954)은 심한 출혈로 사경을 헤매는 환자에게 죽은 지 몇 시간 안 되는 사람의 몸에서 뽑은 피를 과감하게 수혈했다. 환자는 목숨을 건졌다. 이런 섬뜩하고도 기발한 아이디어는 전 해에 우크라이나의 수혈학자인 샤모프(Vladimir N. Shamov; 1882~1962)가 내놓은 특별한 연구에서 얻었다. 샤모프는 사람이 숨을 거둔 후라도 일부 조직은 몇 시간 정도는 살아있는데, 피는 10시간 정도 살아있으므로 적절히 재활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유딘은 샤모프를 믿고 죽어가는 이에게 죽은 이의 피를 수혈했고, 샤모프의 연구가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제 수혈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일단 유딘은 병원 내에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신이 있는 경우에만 수혈을 했다. 다량 출혈로 사경을 헤매는 환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딘의 병원에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신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될까? 유딘은 좀 더 과감하게 한발을 내디뎠다. 숨을 거둔 이의 몸속에서 몇 시간 동안 머물었던 피가 쓸모가 있다면, 아예 미리 뽑아내 몇 시간 저장해둔 피라고 해서 못 쓸 이유가 있을까?
이제 유딘은 비교적 건강하게 살다가 급사한(남에게 옮길 나쁜 병은 없을 것이므로) 시신을 보면 일단 피부터 뽑아 저장하기 시작했다. 피를 뽑은 후라도 유딘은 시신을 반드시 부검하여 혹시 나쁜 병이 있는지 확인했다. 우량한 채혈자인지 재차 확인한 것이다.
물론 저장할 피에는 구연산나트륨을 주입하여 응고를 막았다. 이렇게 저장하다 보니 몇 주가 지난 후에도 수혈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한발 더 나아간 유딘은 시신뿐만 아니라 출산으로 얻게 되는 핏덩이인 태반의 피도 버리지 않고 뽑아서 저장했다(제대혈을 처음 사용한 이가 유딘일지 모른다). 이렇게 유딘은 ‘피는 환자가 필요할 때에 급혈자를 찾아서 채혈 후에 수혈하는 것이 아니라 저장해 두었다가 나중에 사용해도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해서 이용한 의사였다. 체혈과 수혈 사이의 시간장벽을 넘은 의사였다. 수혈의 역사에서 ‘혈액은행(blodd bank)’의 챕터를 쓴다면 유딘의 손으로 혈액은행이 시작했다고 반드시 써야 할 것이다.
유딘은 1930년부터 1938년까지 무려 2,500명의 환자에게 시신의 피를 수혈했다. 수혈자 중 7명만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성공적인 수혈치료를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듣기에는 좀 으스스하기도, 꺼림직하기도 했던지 다른 나라의 연구자들은 유딘의 성공 사례를 따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방의 무관심에도 아랑곳 않고 소련의 혈액은행은 발전하였다. 1930년대 중반까지 전국에 65개 이상의 대규모 혈액센터와 거기에 부속된 500곳 이상의 보조 센터들이 생겼다. 병원 내에도 채혈과 수혈을 위한 시설과 조직을 갖추었다. 저장된 피는 ‘캔’에 담겨 필요한 곳으로 오갔다. 1930년대 소련은 최초의 수혈 선진국의 자리에 올랐다.
미국에서는 소련의 모델을 본받아 1937년에 팬터스(Bernard Fantus; 1874~1940)가 시카고의 쿡 카운티(Cook County)에 수혈 서비스 기구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혈액 보존 연구소(Blood Preservation Laboratory)”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간편하고도 기억에 잘 남는 이름인 ‘혈액은행(Cook County Hospital Blood Bank)’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전 해인 1936년에 스페인 내전(1936~1939)이 터졌다. 그 해에 스페인 의사 듀란-호르다(Frederic Durán-Jordà; 1905~1957)는 바르셀로나에 대규모 혈액은행을 세웠다. 듀란-호르다는 유딘과 달리 ‘살아있는 사람’의 O형 혈액(혈액형에 관계없이 수혈할 수 있기 때문)만 300~400밀리리터를 채혈해 10% 구연산나트륨(혈액응고 방지제)를 첨가해 멸균, 밀봉, 냉장 저장했다. 그는 30개월 동안 3만 명의 공혈자들로부터 9,000 리터의 피를 공급받아 전선으로 보냈다. 전장에 피를 담은 수혈병이 등장한 것은 스페인 내전이 처음이었다.
프랑코의 파시즘에 맞서 열심히 싸웠지만 전세는 공화군에게 불리했다. 1939년 2월에 바르셀로나 외곽까지 파시스트의 군대가 진격해오자 영국 적십자는 듀란-호르다의 탈출을 도왔고, 영국에서는 스페인의 공화파를 지원하던 영국 의사들이 그의 런던 정착을 도와주었다.
런던에서 듀란-호르다는 전시(戰時) 수혈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던 본(Janet Vaughan; 1899~1993)을 만났고 그녀에게 그가 익힌 노하우를 전수했다.
런던은 전쟁의 폭풍이 불어닥치기 직전의 폭풍전야 속에 있었다. 전쟁이 터지면 독일은 강력한 공군력을 앞세워 런던을 폭격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런던에서만 16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엄청난 양의 피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한다면 불바다가 되고 생지옥이 된 후에 급혈자를 찾고, 채혈을 하고, 혈액형 확인을 한 후 수혈을 한다는 말인데, 가능할 것인가?
본은 소련이나 바르셀로나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리 채혈을 해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급한 대로 채혈된 피는 소독된 우유병에 냉장 저장할 수 있었고, 필요한 곳으로 보낼 때는 아이스크림 배달 트럭에 실어 보내면 될 것 같았다. 본은 이러한 시스템을 미리 구축하자고 관련 기관에 제안했지만 번번히 거절만 당했다. ‘산 사람 몸속에 있는 피가 제일 좋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본은 의학연구협회(MRC)로부터 짤막한 내용의 전보 한 통을 받았다.
“채혈을 시작할 것!”
그날은
전쟁은 첫 포성이 울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산 사람의 피가 대지를 적시는 일이다. 전선의 메마른 흙은 젊은이들의 뜨거운 피로 진창이 되어 갔고, 후방에서는 이들을 살려낼 피를 쉴 새 없이 모아야 했다.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헌혈 운동이 벌어졌다.
미국은 1941년 12월이나 되어서야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으므로 전쟁 초기에는 교전국이 아니었지만 영국에 군수품과 더불어 피를 보내주었다(Blood for Britain Project). 하지만 항공 수송도 변변치 않던 시기라 해상 수송로를 이용해 신선도가 중요한 피를 보내는 것은 어려움이 컸다.
미국의 쇼크 치료 연구자인 엘리엇(John Elliott; 1901~?)은 혈장을 이용해 쇼크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심장에 칼에 찔려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가 실려왔고 당장 수혈할 상황이 못 되자 하는 수 없이 자신이 갖고 있던 연구용 혈장 2병을 수혈해주었다(혈장은 혈액형과 무관하게 쓸 수 있다). 1930년대부터 실험적으로 시도된 방식이긴 했지만 이렇게 필요한 환자에게 혈장을 수혈한 것은 처음이었다.
결과는 놀라왔다. 엄청난 피를 흘렸던 환자였지만 금새 의식이 되돌아왔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환자에게 어쩔 수 없이 들어간 혈장은 무려 6주 동안 보관되어 있던 것이었다.
엘리엇은 이 경험을 계기로 자신감을 갖고 혈장을 쇼크 치료제로 연구했고, 다량 출혈로 생긴 저용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에는 까다로운 전혈 대신에 혈장만 수혈해 주어도 쇼크를 막아주는 효과가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혈장은 전혈보다 보관기간도 길고, 안정성도 높고(흔들리기만 해도 깨어지는 적혈구에 비해 혈장은 충격에 망가질 것이 없다), 혈액형을 구분할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사용이 간편한가!
전쟁 발발 1년이 다된 1940년 8월에 미국에서 분리된 혈장이 처음으로 영국행 수송선에 실렸다. 영국으로 혈장을 보내는 사업(The Blood Plasma for Great Britain Project )은 미국 ‘혈액은행의 아버지’ 드류(Charles Richard Drew; 1904~1950)가 주도했다. 5개월 동안 시민 15,000명이 헌혈한 피에서 혈장 5,500 병 이상을 뽑아 영국으로 보냈다. 명실상부한 혈맹(血盟)의 탄생이다.
나중에는 영국도 전혈 ‘편애’ 정책에서 벗어나 1941년 1월에 자국 내 혈장 가공 시설을 세웠다.
하지만 혈장도 단점이 있었다. 너무 쉽게 오염이 되었다. 8월에 미국에서 실었던 혈장이 11월 영국에 도착했을 때는 세균에 오염된 것들이 발견되었다. 물론 미국에서는 3차례 검사를 받아 통과한 것이었다. 세균에 오염된 혈장을 치료 목적으로 수혈하는 것은 환자를 죽이는 일과 같으므로 상상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일이 아닌가? 만의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는 감염을 막기 위해 새로운 공정이 도입되었다. 냉동과 건조였다.
전혈을 채혈하면 바로 냉동하여 제약회사로 보낸 다음 혈장을 분리해 말린 후 가루로 만들었다. 대략 전혈 50단위에서 혈장 1단위가 만들어졌다(나중에 이것이 또 다른 문제의 근원이 된다). 건조 혈장은 양철 깡통에 넣어 밀봉했다. 건조 혈장 한 깡통과 주사용 멸균수 1병을 묶어 두터운 마분지로 포장을 하면 1회용 ‘건조 혈장 주사용 키트’가 되었다. 이 키트들을 전선으로 보냈다.
건조 혈장은 내구성이 아주 좋았다. 3층 높이에서 떨어져도, 사격 중인 함포 아래에 두어도 전혀 변질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건조 혈장은 몇 년씩이나 보관했다가 쓴다 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전선에 도착한 건조 혈장 키트는 위생병들이 꿰차고 전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위생병이 부상병을 발견하면 먼저 소총을 거꾸로 세워 임시 폴대로 삼았다. 그리고 건조 혈장에다가 멸군수를 첨가하면 곧바로 수혈용 액체 혈장이 완성되었다. 소총 걸쇠에 혈장을 걸고 부상병의 정맥에 주사줄을 연결하면 곧바로 수혈이 시작되었다. 심한 출혈로 의식을 잃어가던 부상병이 곧바로 의식을 되찾을 정도로 혈장은 효과가 좋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결점은 있었다. 위생병들이 전장에서 들고 뛰어다니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웠다. 키트는 도시락만한 크기에 몇 킬로그램은 족히 나갔다(웬만한 노트북을 매고 뛰어다닌 기억이 있는지?). 그리고 말이 쉬어서 즉석 조제지, 혈장 가루를 주사용 액체 혈장으로 만드는 데는 15분은 족히 걸렸다. 총탄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목숨이 촛불처럼 위태로운 병사들 앞에서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더 나은 방법이 필요했다.
여기서 단백질 전문가인 콘(Edwin Joseph Cohn; 1892~1953)이 등장했다. 이미 단백질 전문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콘은 혈장의 성분 중에서도 쇼크를 막아주는 ‘그’ 성분을 찾아 분리하기로 결심했다.
혈장은 수분 93%, 염분 1%, 단백질 6%로 이루어져 있는데 단백질은 다시 피브리노겐, 글로불린, 면역물질, 콜레스테롤, 그리고 알부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콘은 알부민에 주목했다. 아주 안정된 단백질로 물을 엄청나게 끌고 다니는 성질이 있는 알부민이 바로 쇼크를 치료하는 혈장의 핵심 기능의 근원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쇼크 환자에게 혈장 대신 알부민을 주사해보면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콘은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알부민의 효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불쌍한 학생들은 무려 1리터에 가까운 피를 뽑혔다. 그 다음 그들에게 전혈도, 혈장도 아닌 농축 액체 알부민만 주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학생들은 금새 정상 수준의 혈류량을 회복했다. 이제 앞으로는 무겁고 번거로운 건조 혈장 대신 어른 주먹만한 농축 알부민만 들려주면 될 것이다.
바로 그 즈음에 미국은 진주만 공습을 당했다. 순식간에 약 2,500 명의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콘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급히50병 정도의 알부민을 모아 진주만으로 가는 수송기에 실었다.
아직 임상시험을 통해 그 효능과 부작용을 확인하지 못한 알부민이기에, 사실상 희망이 없는 최악의 중증 화상 환자 7명이 알부민 수혈을, 아니 주사를 맞았다. 기존의 치료방법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던 환자였지만 그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알부민의 효능이 확인되자 다른 중증 환자들에게도 알부민이 투여됐다. 진주만에서 모두87명이 알부민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4명에게만 가벼운 부작용이 나타났다.
알부민의 엄청난 위력을 실감한 연구팀은 곧 입을 닫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적들이 개발하지 못하도록, 알부민은 군사 기밀로 분류되었다.
진주만 이후로 미국은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태평양과 대서양에 두 개의 전선이 생겼다. 전선에서는 병사들의 피가 흘러 넘쳤고, 후방의 적십자는 그들에게 수백만 파인트의 피를 공급했다. 참전 1년을 채우지 못한 1942년 11월이 되자 7개의 제약사 연구소에서 매달 1만 단위 이상의 알부민을 찍어냈다. 하지만 공급량은 수요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냉동 건조 혈장도 9개의 제약사 연구소에서 꾸준히 생산했다. 다시 1년이 지난 1943년 연말에는 군에 250만 봉의 건조 혈장과 125,000 앰플의 알부민이 공급되었다.
심한 출혈로 저용량성 쇼크에 빠진 환자에겐 알부민이나 혈장을 주사하여 순환 혈류량을 늘리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혈장이나 알부민으로 일단 쇼크에서 회복되던 부상병들이 곧 산소 부족으로 목숨을 잃는 일들이 발생했다. 당황한 의사들은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곧 혈류량은 늘었어도 그 속에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혈장/알부민)이 아니라 건더기(적혈구)도 보충해주어야 하는구나!
생각해 보니 부상병들은 상처를 통해 혈장이나 알부민만 잃는 것은 아니었다. 전혈을 흘렸다. 그렇다면 여건이 허락된다면 전혈을 수혈해주는 것이 제일 좋겠다는 생각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연합군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영국은 처음부터 전혈 위주로 수혈 정책을 짰다. 본토 각지에서 채혈된 전혈은 브리스톨로 모이고, 이곳에서 수송기에 실어 전선에 가까운 수혈기지까지 공수한 후, 여기서 최전선으로 분배했다. 비교적 가까운 노르웨이나 프랑스 전선에는 수송기로 혈액을 바로 공수했다. 하지만 수송기로 한달음에 도달할 수 없는 북아프리카 전선에는 카이로에 혈액은행을 세워 현지에서 피를 자체 수급했다.
미국은 전선과 본토가 애초부터 멀었다. 그래서 신선도가 중요한 전혈은 애초부터 공급할 수 없어 혈장 위주의 수혈 정책을 짰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전혈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영국처럼 자체의 혈액은행을 운용했다. 나중에 이탈리아를 해방시킨 후에는 나폴리에도 혈액은행을 세워 이탈리아 전선으로 전혈을 공급했다. 이렇게 지중해 전선에서 최소한 8만 파인트의 전혈을 현지에서 자체 수급했다(미군의 전혈이 대서양을 넘어 온 것은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한 1944년 8월이었다).
영국이나 미국이나 전혈은 주로 현지의 경상자들이나 비 전투원에게서 얻었는데, 미국은 1파인트당 10달러(지금 가치로는139달러)를 주었다. 그러니 휴가를 목전에 둔 병사들이 채혈 센터에 긴 행렬을 이루었다. O형이 아닌 병사들은 그저 부러운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945년 2~3월에 있었던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군은 처음으로 전혈과 혈장의 조합으로 수혈작전을 폈다. 위생병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아버지의 깃발(Flags of Our Fathers, 2006)>을 보면 전장에서 위생병이 어떤 식으로 수혈치료를 하는지 엿볼 수 있다. 혈장이나 알부민은 전투 현장에서 바로 사용되었고, 운반이나 보관이 까다로운 냉장 전혈은 전선의 바로 뒤에 있는 구호소에서 사용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는 영국, 프랑스, 캐나다는 모두 전혈을 준비했다. 미군은 영국 주둔 미군에게서 전혈을
뽑아 비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의학자들에게 수혈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산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채혈한 피는 수주간 안정적으로 보관할 수 있고, 환자를 기다리지 말고 현장으로 가져가 수혈할 수 있으며, 타인의 피를 많이 맞는다고 해서 위험할 일은 없다는 교훈 말이다. 수혈의 짧은 역사에서 본다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엄청난 발전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고 해서 피는 불필요한 물건이 되었을까? 출혈은 외상이나 분만의 중요한 사망 원인이었다. 전쟁을 겪으며 수혈의 중요성을 깨달은 여러 나라들은 서둘러 정부 차원의 혈액 공급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피는 무료로 제공되는 공공자원이었지만, 미국에서는 피를 팔아 돈을 받을 수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매혈과 헌혈이 혼재했다. 매혈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한편, 콘은 피를 성분별로 거의 다 분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혈액의 각 성분을 구분하여 뽑아내어 보관했다가 필요한 환자에게 성분별로 수혈(성분수혈)을 해주면 귀중한 피 자원을 더욱 경제적으로 쓸 수 있었다. 이를테면, 전혈 4파인트는 피가 필요한 환자 4명에게 각각 1파인트씩 수혈해주면 끝이지만, 적혈구와 혈장으로 그 성분을 구분하여 수혈한다면 4명에겐 적혈구를, 두 명에겐 혈장을 수혈할 수 있다. 이렇게 성분별 맞춤 수혈을 한다면 4명에게 들어갈 전혈로 24명의 환자들이 나누어 쓸 수가 있다.
콘은 더 나아가 혈장에서 알부민, 피브린, 감마글로불린, 혈우병 환자를 위한 응혈제, 혈액형 검사용 시약 등을 뽑아내었다. 모두 엄청난 값어치를 가지는 파생 상품이 되었다. 그러자 너 나 할 것 없이 피를 뽑아 혈장을 얻어 미량 성분을 분리하려는 사업에 뛰어들어 골드 러시(Gold Rush)도 무색할 ‘블러드 러시(Blood Rush)’가 시작되었다. 피의 성분을 구분해서 뽑아내는 신산업은 어쩐지 원유을 증류해 다양한 유제품을 만드는 정유(精油) 산업과 닮아 보였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정유회사의 유전(油田)은 외딴 사막이나 먼 바다에 있었지만 제약회사의 ‘혈전(血田)’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하지만 제약회사는 혈전을 직접 시추하지는 않았다, 채굴은 매혈(賣血) 센터로 알려진 곳에서 했다. 돈이 궁한 이들은 이곳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와 자신의 팔뚝에 시추공을 뚫게 했다. 이렇게 채혈한 피는 비싼 값으로 제약회사에 팔았고, 제약회사는 피를 성분별로 분리하여 다양한 혈액제제들을 만들었다. 물론 환자들에게 팔아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너 나 할 것 없이 피를 사고파는 일에 투신하였다. 전국적으로 매혈 센터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피를 사고파는 일은 ‘신종 사업’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없지 않았다. 피를 팔아서 생계를 이어갈 정도의 사람이라면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회인이었을까? 대부분 그날의 생계를 그날 해결해야 하는 실업자, 아니면 술값벌이에 나선 주정뱅이들, 약값이 필요한 약물중독자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불량한 원료로부터 만들어낸 혈액제제에서 문제가 생긴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제일 먼저 희생된 이들은 혈우병 환자들이었다.
혈장에서 뽑아낸 항혈우병 인자는 1960년대부터 상품으로 나왔다. 혈우병 환자들도 주사만 맞으면 운동도 할 수 있고, 여행도 다닐 수 있어 여간 편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에 에이즈(AIDA)가 세상에 알려졌고, 1982년에 에이즈에 감염된 혈우병 환자가 확인되었다. 1985년에 감염 원인이 수혈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혈우병 환자들의 절반에서 에이즈 양성 반응이 나왔다. 혈우병 환자들이 에이즈로 죽어갔고 미국에서는 법정 공방이 시작되었다. 제약회사들은 패소하였고, 프랑스에서는 의사들이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수혈로 인한 감염이 에이즈가 처음도 아니었다. 특히 수혈로 옮는 간염(hepatisis)은 이미 전쟁 중에 악명을 떨쳤다. 전쟁 중에 수혈을 받은 부상병들 중에 간염이 집중 발병했고, 수혈 때문에 간염이 생긴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에 의하면 이상하게도 전혈보다는 혈장을 맞은 병사들에서 훨씬 더 많이 생겼다. 왜 그럴까? 전혈 1파인트는 한 사람에게서 온 피지만, 혈장 1파인트는 무려 50명의 피를 모아서 만든 것이다. 그러니 50명 중 단 한 명이라도 간염 바이러스를 가졌다면 여지없이 간염이 옮아버렸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참전한 첫 전쟁인 6.25전쟁 중에는 수혈 후 간염 발병률이 무려 22%나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해 3배나 높은 수치다.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50명의 피를 모아 1파인트로 만든 혈장을 썼지만, 6.25전쟁 중에는 200명의 피를 모아 1파인트로 만든 혈장을 썼다. 그러니 훨씬 더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는 간염 바이러스를 확인할 수 없었다. 최선의 방법은 간염 확률이 높은 급혈자를 미리 제외하는 것인데, 피가 당장 돈이 되는 급혈자들이나 매혈 센터에겐 그런 분별은 사치였다. 매혈 센터에서는 간염 병력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피를 사주었고, 제약회사에서도 그런 무분별을 눈감아 주었다. 확률적으로 보면, 상품을 더 많이 만들수록 더 많은 감염 환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환자가 생기는 것은 아니므로 그냥 넘어갔다. 모두 말은 안 했지만 시한폭탄 돌리기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1964년에 B형 간염 표면 항원(HBs Ag)이 발견되었다. 매혈과 헌혈에서 검출률을 비교해 보니 역시 매혈이 3배나 많이 나왔다. 미국에서는 1978년부터는 혈액에 ‘원산지’ 표식 격인 매혈과 헌혈을 구분하는 라벨을 붙였다. 그러자 매혈로 얻은 피를 점점 기피하게 되고, 아울러 B형 간염 발병도 급격히 줄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C형 간염이 등장했다.
‘A형도 B형도 아닌 간염(non A non B hepatitis)’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C형 간염은 수혈 후 걸린 간염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수혈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혈액 속에 존재하는 HIV, GBV, HCV, HTLV, 말라리아 등의 감염원을 사전에 찾아내는 검사들이 도입되어 수혈 후 감염의 발병률은 상당히 낮추어졌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새로운 감염원이 확인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수혈의 긴 역사를 살펴보았다. 길지 않은 역사이지만 혈액 연구와 수혈법의 발전은 비교적 최근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는 혈액에 관해 얼만큼 알고 있을까? 모르는 것은 얼마나 될까? 언제 갑자기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어 우리를 환호하게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가 아는 모든 진실을 뒤엎을 수도 있는 ‘위험한 액체’란 것을 우리는 짐작만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 몸속을 쉼 없이 돌아다니는 이 붉은 액체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신비한 매력을 잃지 않을 것 같다.
출처 : 디아트리트 VOL.17, N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