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7 (수)

  • 구름많음동두천 20.9℃
  • 구름조금강릉 22.7℃
  • 흐림서울 21.7℃
  • 맑음대전 24.6℃
  • 맑음대구 25.7℃
  • 구름조금울산 23.8℃
  • 맑음광주 23.4℃
  • 구름조금부산 25.1℃
  • 맑음고창 23.7℃
  • 구름많음제주 23.0℃
  • 구름많음강화 21.1℃
  • 구름조금보은 22.0℃
  • 맑음금산 23.5℃
  • 구름조금강진군 24.4℃
  • 구름조금경주시 25.0℃
  • 구름조금거제 24.9℃
기상청 제공

기자수첩

가루약 조제, 원칙과 현실 사이의 줄다리기

의약품은 애초에 제약사가 생산해 낸 제형 및 용법을 그대로 따르는 게, 환자의 안전을 최대한 담보할 수 있는 길이다. 여기에 대해 딴지를 걸 보건의료 전문가는 없을 것이다.


제약사는 자사가 발굴한 유효성분이 의도한 바대로 환자에 가장 잘 전달될 수 있는 제형으로 개발하여 의약품을 생산한다. 때문에 유효성과 안전성 연구 역시 출시될 제형 조건 하에 진행되며, 이 조건 하에서만 그 의약품의 품질이 보장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삼킴곤란’을 겪는 노인 환자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유아·어린이 혹은 특정 질환으로 인해 알약 복용이 힘든 환자에서 가루약 처방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이들 중 대형병원을 이용하는 환자들은 3~5개월 간 복용해야 하는 약제를 한꺼번에 가루약으로 처방 받는 사례가 증가하며, 대형병원 문전약국들의 가루약 처방 거부 사례 역시 증가하고 있다.


거부를 당하는 환자들의 입장은 의약품 접근권이 심각하게 침해 당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상급종합병원 문전약국들이 가루약 조제를 거부하면 동네약국에 가야하고, 동네약국에서도 거부하면 환자나 보호자들이 집에서 직접 알약을 갈아서 복용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 환자권리옴부즈만이 최근 서울시 소재 상급종합병원 문전약국과 환자 또는 보호자 그리고 서울시 소재 약국의 약사를 대상의 설문조사를 실시한 바에 따르면, 서울시 소재 13개 상급종합병원 문전약국 128곳 중 58곳에서 가루약 조제가 불가능하다고 답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환자와 보호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가루약 조제 거부 경험이 있다는 답변이 30.7%를 차지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가루약 조제 거부에 대한 대책 마련은 필요해 보인다.


이를 위해 조제수가 가산제, 지정약국 가산제 및 의약분업 예외조항 개설까지 다양한 대증적 방안이 논의되고는 있지만, 약학자들은 가루약 조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가루약 조제가 이뤄지고 있는 현실과 이런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은 십분 인정하지만, 의약품의 제형 변경은 본래 그 의약품이 가지고 있는 효능과 안전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3~5개월치의 장기처방을 가루약으로 조제한다는 것은 각각의 제형이 가지는 용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며, 이런 몰이해는 자칫 환자에게 약을 독으로 만드는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흔히 "속방정, 서방정, 코팅정" 등으로 불리는 의약품의 제형은 인체 내에서 유효성분의 분해 속도, 타겟 기관 혹은 흡습성 등을 고려해 약제의 개발 당시부터 치밀하게 설계되어 정하는 것들인데, 이를 무시하고 모두 가루의 형태로 만든다면 효과와 안전성은 물론이고 산소나 습기 등으로 인한 변질을 막을 수 없어, 결국 환자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약학계는 가루약 처방 및 조제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현실이라면, 가루약 금지 의약품 목록을 하루빨리 만들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DUR(의약품 안전사용서비스)과 같이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예지 대한약국학회 약료위원장은 "제형 변경을 금지하고 있는 의약품은 약제 라벨에 반드시 이를 명시하고 있다"고 말하며, "정부는 이러한 약제 목록만이라도 취합하여 의사가 약제를 처방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루약 처방이 불가피한 환자라면 처방전 입력 시 적어도 가루약 금지 의약품이 공지되도록 하여, 가루약 조제가 가능한 동일 효능의 다른 의약품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제약사가 고령화를 감안하여 되도록 다양한 제형의 의약품을 개발하도록 독려하고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제약사가 애초에 다양한 용량과 복용법을 가진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불가피한 제형 변형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일단 내년부터 가루약 조제수가를 30% 가산하는 방식으로 약국들의 가루약 조제 거부를 줄여보겠다는 입장이지만, 실효성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환자 단체 역시 조제수가 인상에 대한 효과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가루약 처방과 조제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정부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환자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대증요법과 동시에 근본적으로 가루약 임의 조제를 대체할 수 있는 장기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