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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태움이 의료시스템과 수가 탓?

지난 3일 서울 종로에서 간호사 · 시민 3백여 명이 모여 촛불을 들었다. 이날 간호사연대(NBT)는 故 박선욱 간호사 추모 집회 '나도 너였다'를 열고, 태움 문화를 박 간호사 사인으로 지목했다. 태움이란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선배 간호사가 신규 간호사를 괴롭히며 가르치는 방식을 일컫는다.

설 연휴였던 지난 2월 15일, 서울아산병원 내과계 중환자실에서 근무했던 입사 6개월 차 박 간호사가 송파구 소재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죽은 박 간호사의 남자친구는 18일 간호사 온라인 익명 게시판에 "가르침 없이 기계적으로 여자친구를 대하고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던 사수를 비롯해 여자친구를 힘들게 하고 무서움에 떨게 했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태움이 여자친구를 죽음으로 몰아간 요소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라는 글을 올렸다.

서울아산병원 A재직자의 진술에 따르면, 죽은 박 간호사가 유서에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다고 했다. 서울대병원에 재직 중인 B간호사는 지난 7일 "서울아산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들이 선배 간호사들이 죽은 동기 간호사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수군거리는 걸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 괴롭다고 했다."라고 전했다.

즉, 간호계의 고질적 병폐인 태움이 박 간호사의 주 사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현재 청와대 홈페이지에 진상 규명 취지의 국민청원이 게시됐고, 경찰이 선배 간호사의 괴롭힘이 있었는지와 관련한 사실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2월 20일 대한간호협회 홍보팀은 "간호 인력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한 괴롭힘은 계속 있을 것 같다."라면서, "간호사는 수가가 없다. 보상이 없다 보니, 많이 쓰면 인건비가 많이 나가서 병원에서는 경영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이 너무 크다 보니, 그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는 해결이 어렵다."라고 말했다.

같은 날 서울아산병원 홍보팀 역시 주요 사인으로 기형적 의료시스템을 지목했다. 홍보팀은 박 간호사가 과도한 중환자실 업무량에 시달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자체적으로 병원 내 TF를 구성해 진상 조사를 진행 중이며, 자살 사건에 연루된 선배 간호사들은 충격으로 인해 현재 일을 쉬고 있다고 했다.

양측은 기형적 의료시스템과 간호 수가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했다.

이에 앞서 보건의료노조는 2월19일 성명을 발표하고, 직무 스트레스와, 긴 노동시간, 과도한 업무량, 열악한 노동조건과 조직문화 등이 박 간호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지적했다.

성명서에서 노조는 "실제로 박모 신규간호사는 입사 후 6개월의 신규 적응 교육 동안 살이 5kg나 빠질 정도로 끼니를 일상적으로 걸렀고,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저녁번(evening) 근무를 오후 1시에 출근해서 다음 날 새벽 5시에 퇴근할 정도로 극심한 업무량에 시달렸고, 신규 적응 교육 기간 출근하기를 힘들어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라면서, "실수로 환자 수술 후 뱃속에 고이는 피나 체액을 빼내는 관인 배액관이 찢어지는 일이 발생하자 소송에 걸릴까 두려워 밤새 간호사 실수에 관한 소송피해사례를 검색할 정도로 실수에 대한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는 무서움과 불안함도 컸다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지난해 12월을 시작으로 간호사 지속 근무환경 마련을 위한 연속 정책 간담회가 세 번에 걸쳐 국회에서 개최됐다. 심지어 세 번째 간담회는 '신규간호사의 현장적응을 위한 간호교육 개선방안'을 주제로 열렸다. 

그런데 개선 방향을 얘기한 지 불과 한 달도 채 안 돼 신규간호사가 자살했다.

그간 간협에서는 간호사 인권 보호 및 근무환경 개선을 위해 협회 차원에서 일련의 노력을 실현해왔다. 또, 간호계 내부에서도 태움이 병폐임을 자성하고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 그런데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가 없다. 약간의 개선 효과는 있을지언정 어김없이 사건 · 사고가 반복된다.

1월 3일 국회에서 개최된 간호사 연속 정책 간담회에서 신한대학교 간호대학 박소영 교수는 "신규가 들어오면 경력자들이 힘들어진다고 한다. 이 병원에 오래 안 있을 거라고 판단되면, 차라리 빨리 나가도록 하는 게 낫다고도 말한다."라고 말했다. 신규간호사가 빨리 나갈 것으로 판단해, 선배 간호사가 일부러 태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근본적 · 본질적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당연히 동의한다. 그런데 태움을 의료시스템의 실패로 끌고 가는 것은 어폐가 있다.

태움은 괴롭힘 문화이다. 

태움과 유사 사례로 군대 조직에서 발생하는 가혹행위를 예로 들 수 있다. 흔히 부대에서는 업무강도와 위계서열 등의 이유를 들어 하급자 대상으로 폭행, 폭언 등이 일상처럼 가해지고 있으나 조직 특성상 폐쇄성이 짙어 은폐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괴롭힘을 사유로 한 사망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자 정부에서도 그 심각성을 인지해 어느정도의 개선은 이뤄지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그 뿌리를 뽑지 못하고 있다.

학교 폭력이 발생했을 때 우리 사회는 가해자 학생을 무조건적으로 포용하지 않는다. 불우한 가정환경 탓이라 해도 어떤 이유에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이전과 다르게 가해자를 동정 · 이해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불우한 상황에 똑같이 처할지라도 모든 이가 무조건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폭력이 옳지 않다는 것은 상식이다.

물론 병원은 학교 현장과 다르다. 일하는 직장이며, 열악한 노동 환경과 고강도 업무를 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괴롭힘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수가 문제로 인력 수급이 어려운 탓에 한 사람이 많은 일을 떠안는 기형적 구조라고 해도 화풀이 대상으로 애먼 간호사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지난 1월 30일 이대목동병원 관련 국회 토론회에서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이상윤 책임연구위원은 "얘기가 조심스럽다. 아직 상황이 진행 중인데, 구조적 · 제도적 문제를 얘기한다는 게 잘못 받아들여지면 병원이나 개별 의료인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물타기를 하는 식이 될 수도 있다. 즉, 병원 · 의료진에게는 잘못이 없고 제도 · 구조 문제로 쉽게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 위원의 말을 빌리자면, 아직 사건 수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박 간호사의 사인을 태움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이를 벌써부터 구조적 문제로 결부시키면 가해자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진다. 물론 태움이 원인이라면 말이다.

한편으로는 간협에 당부하고자 한다. 협회는 회원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지난 21일 선출된 간협 신경림 신임 회장은 선거 공약으로 간호조무사의 간호실무사 명칭 변경 저지를 강력히 내세웠다. 그런데 그것이 간호사 권익 신장에 있어서 진정 주요 사안인지 묻고 싶다. 

간호사 죽음은 분명한 간협의 실패다. 간호사의 자살을 단순히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할 수 없다. 부디 협회가 태움 문화 개선을 최우선으로 두고,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해 적극적으로 시행했으면 한다. 말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회원 보호 행동이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

긍정적인 변화의 바람도 있다. 2월 23일 신입직원에 대한 정신적 · 신체적 자유를 구속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처벌할 수 있게 하는 일명 신입직원 태움 금지법이 발의된 데 이어, 지난 9일 태움을 근절하기 위한 취지로 간호사 1인당 적정환자 수를 규정한 의료법 개정안이 대표발의됐다. 

아직은 쌀쌀하지만 3월은 봄이다. 부디 이 개정안들이 국회에서 통과돼 의료계에도 조속히 봄이 찾아오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