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면 신경과 학회에서 메일을 받는다. <의당 학술상>이나
<에밀 폰 베링 학술상> 받을 사람을 추천해달라는 내용이다. 상금이 수 천 만원이나 되는 큰 상이다. 물론 필자가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 되겠지만 개원의인 필자가 상을 받을 일도, 후보자를 추천할 일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특별한 이름이 붙은 상이라 필자는 그 사연이
궁금했다. 무슨 사연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어있나 한번 알아보았다.
<의당(毅堂) 학술상>은 진단검사의학의 개척자이자 헌혈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故의당 김기홍 박사(1921~1986)을 기념하는 상이다. 의당
박사의 유족과 대한의사협회가 1994년에 제정해 매년 수여하고 있다.
수상 자격은 우리나라의 기초의학전공학자 및 임상병리학 전공학자에 국한된다. 그러므로 신경과
개원의인 필자는 해당사항이 없다. 그렇다면 꿩 대신 닭이라고, 혹시 <베링상>은 필자가 한번 노려도 될까?
‘베링’하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베링해(海)’다. 조사해 보니 베링(Vitus
Jonassen Bering;1681~1741)은 덴마크 출신의 러시아 항해가로, 지금의
베링해와 알래스카를 탐사했고, 괴혈병(선원들의 고질병이었다)으로 죽어 베링 섬에 묻혀 있다. 혹시 해양 의학 전공자에게 주는
상일까? 아니면 괴혈병 연구자에게?
아니었다. 베링상(賞)의 베링은 항해가 ‘비투스
요나센 베링’이 아니라 ‘에밀 폰 베링을 기리는 학술상이다(그래서 상에 이름을 길게 붙여놓은 것으로 보인다). 에밀 폰 베링(Emil Adolf von Behring;1854~1917)은 독일(프로이센)의 미생물학자 겸 면역학자로 1901년에 노벨 생리학-의학상 최초 수상자가 되었다(그 해에 뢴트겐은 X-선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노벨상 1호
수상자를 기리며 주는 상이니만큼, 그 의미가 각별한데, 이쯤에서
베링에 대해 한번 알아보자.
에밀 폰 베링
베링은 1854년에 폴란드
접경의 프로이센 지방에서(지금은 폴란드 땅이다)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밀 아래로 12명의 동생들이 더 태어났고,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대학 진학은 어려웠다. 해서 베링은 베를린에
있는 군의관 양성학교(Kaiser-Wilhelm-Akademie für das militärärztliche
Bildungswesen, Berlin)에
입학한다(1874년).
4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후 폴란드 주둔군 군의관으로 발령받는다. 폴란드에서 지내는 동안 여분의 시간을 이용해
요오드 성분의 소독약(iodine tri-chloride)을 연구한다.
베링은 이 소독약이 균을 죽이지는 못하지만 균이 내뿜는 독을 ‘중화(neutralize)’시킬 지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이것이 나중에
디프테리아 연구의 아이디어가 될 줄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베링은 관계자의 눈에 띄었고, 본(Bonn)에 있는 약리학 연구소로 보냈진다. 본에서 실험 기법에 대한
훈련을 받는다. 1888년에는 다시 베를린에 있는 위생 연구소로 보내져 저명한 미생물학자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 1843~1910)의 조수가 된다. 물론 베링도 바라던 일이었다. 수 년 후 코흐가 감염병 연구소(지금은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Robert Koch Institute; RKI)1)로 옮길
때 베링도 함께 옮긴다.
당시는 세균학의 ‘대항해
시대’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새로운 뱃길을 열어 대발견의
시대를 이끌었다면, 현미경으로 연 대항해 시대는 프랑스와 독일이 선두주자였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전한 굴욕을 안은 프랑스는 세균학에서
국가적 자존심을 세우려 했고, 이에 맞서는 독일(프로이센) 역시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 세균학 전쟁의 최일선에는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와 코흐(1843~1910)가 있었다. 베링이 활동하던 시절이 되면 두 사람은 일선에서 물러났고 그의 제자들이 스승들의 유전자를 물려받고 뜨거운 경쟁을
벌였다. 이 무렵 독일의 왕족들의 목숨도 앗아간 디프테리아가 연구 대상으로 떠오른다.2)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디프테리아 환자를 본 의사가 있을까? 아마도 은퇴한 원로 의사 정도는 되어야 디프테리아 환자를 봤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필자도 30년 전에 소아과학을
배울 때 디프테리아가 포함된 접종 일람표를 열심히 외웠다. 신경과 전공의 때도 교과서에서 디프테리아
신경중독을 공부한 기억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환자를 만난 적은 없다.
디프테리아는 그냥 교과서에 나오는 사문화(死文化)된
병이었다. 하지만 150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본다면 디프테리아는
끔찍한 병이었다. 호환(虎患)이나 마마(small pox)에 버금가는 학살자였다.
디프테리아는 감기처럼 시작한다. 하지만
곧 기침이 심해지고 이것이 심해져 호흡곤란이 일어나 아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새파랗게 질린다면 어서 목 안을 들여다봐야 했다.
아이의 연구개와 편도에 전에 없던 살집이 보인다면 이것이 그 유명한 위막(pseudomembrane)이다. 검고 단단한 가죽처럼 보이며 악취를 내뿜는 위막은 아이가 끔찍한 디프테리아에 걸렸다는 불길한 통보서가 된다. 3)
큰일이다. 위막(pseudomembrane)으로 불리는 이것은 악취를 내뿜는 검고 단단한 가죽같다. 디프테리아란 이름도 그리스 말로 ‘가죽’을 뜻하는 diphthérite에서 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이가 끔찍한 디프테리아에 걸렸다는 불길한 고지서나 다름없다.
지금도 소아과 의사들이 감기에 걸린 아이의 목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편도를 보는 의미가 크겠지만, 오래 전 디프테리아의 위막을 찾아보던 오랜 전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균과 죽은 세포들이 만든 이 기분 나쁜 살덩어리는 점점 자란다. 목 안의 살덩이는 아이들이 삼키는 것을 방해하고, 콧구멍으로는 피고름을
내뿜는다. 점점 더 자라면 마침내 숨길을 막아버려 아이들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된다.
이 기분 나쁜 살덩이를 잘라내면 되지 않을까? 칼을 대었다가는 피만 엄청나게 쏟을 뿐 떼어지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살덩이를 피해 숨길을 여는 기관지 삽관(endotracheal intubation)을 한다. 의사가 해줄 유일한 대책은 이 정도였다.
자, 이제 삽관을 해두었으니
숨만 잘 쉬면서 버티면 아이들은 회복이 되겠지? 천만의 말씀이다. 숨을
잘 쉴 장치를 달아 두어도 아이들은 호흡곤란이 오고 심장마비가 생기고 호흡마비가 왔다.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른 채 아이들은 숨을 거두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디프테리아는
목 안에, 빤히 보이는 그곳에 있는데 왜 호흡마비가 오고 심장마비가 온다는 말인가? 디프테리아는 한마디로 하늘이 내린 재앙이었다. 저잣거리의 아이들도, 고귀한 귀족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1883년과 이듬
해에 코흐 연구소의 뢰플러(Friedrich Löffler;1852~1915)와 취리히의 클렙스(Theodor Albrecht Edwin Klebs Theodor Edwin Klebs;1834~1913)는
디프테리아 환자의 위막에서 세균을 분리한다.
디프테리아의 원인균이 될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이 균은 두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클렙스-뢰플러균(Klebs– Löffler bacterium)’으로 불렀다가 나중에 ‘코리네박테리움 디프테리애(Corynebacterium diphtheriae)’로 개명한다. '디프테리아를 일으키는 곤봉 모양의 세균(Corynebacterium diphtheriae)'이란 뜻이다.4)
하지만 뢰플러는 혼란스러웠다. 균은
목의 위막에만 검출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환자들은 심장마비나 호흡마비로 죽는단 말인가? 뢰플러는 갖은 노력을 다해보았지만 결국 그 이유를
밝히지 못한다. 뢰플러는 디프테리아균은 국소적인 감염(위막
형성)에 더하여 전신을 떠도는 ‘독성 물질’을 만들지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후학들에게 그 독소를 발견해서
자신의 불완전한 가정을 증명해달라고 부탁한다.
뢰플레의 예측은 4년 후
파리의 루가 증명해준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일하는 루(Pierre
Paul Émile Roux;1853~1933)는 디프테리아균이 아닌 균의 ‘배양액’을 실험동물에 주사해 신경마비가 일어나는 현상을 발견한다. 디프테리아에
걸리면 단순히 호흡 문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심장마비나 신경마비로 죽는 이유는 균 자체보다는 균이 만든 독소 때문이었다. 균이 만들어 온몸으로 퍼지는 독소는 디프테리아균이 처음이었다.
맹독(猛毒)이었다. 30그램만 있으면 개 7~8만
마리를 죽일 정도였다. 뢰플러의 예측처럼 디프테리아균은 목의 위막에 자리잡고 증식하면서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독소를 만들어 내뿜기 시작한다. 독은 1~2주만에
가까운 가까운 목(구개) 근육, 뇌신경, 안구운동 마비를 일으켰고,
5~8주 만에 팔다리 마비를 일으켰다. 이윽고 호흡 마비나 심장 마비가 뒤따라오면 영락없이
목숨을 잃는다. 항생제도 없던 시대에 이 엄청난 독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다음 호에
계속
1) 지금은 우리나라의 질병관리본부에 해당하는 국가 기관이다(wikipedia).
2) 1878년에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딸로 헤세-라인
대공비인 앨리스가 디프테리아로, 1880년에는 헤세-라인의
공주로 태어나 러시아로 시집간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가 디프테리아로 죽었다.
3) 디프테리아란 이름도 그리스 말로 ‘가죽’을 뜻하는 diphthérite에서 온 것이다.
4)
코리네박테리움(coryne+bacterium)은
곤봉 모양의 세균이란 뜻이다.
1.
미생물의 힘(Power Unseen; How Microbes Rule the World by Bernard Dixon, 1994)/버나드
딕슨 지음/이재열, 김사열 옮김/사이언스북스/2002
2.
전염병의 문화사(Man and Microbes by Arno Karen, 1995)/권복규
옮김/사이언스북스/2001
3.
소설처럼 읽는 미생물 사냥꾼 이야기(Microbe Hunters by Paul de Kruif,
1926)/폴 드 크루이프 지음/이미리나 옮김/몸과마음/2005
4.
2009년 법정전염병 진단, 신고 기준/보건복지주, 질병관리본부. 대한의사협회 공저/2009
5.
신경과학/아담스 신경과학 편찬위원회/도서출판 정담/ 1998
6.
당신에게 노벨상을 수여합니다(The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2007)/노벨 재단 엮음/유영숙, 권오승, 한선규 옮김/바다출판사/2007
7.
우려되는 국가 필수예방접종 기피 현상/중앙일보
기사/2016.10.10.
8.
Online etymology dictionary
9.
Emedicine.medscape.com
10. Nobelprize.org
11. Oxford
vaccine group; vaccine knowledge project (http://vk.ovg.ox.ac.uk/vk/diphtheria)
12. Cslbehring.com
13. 연합뉴스
누리집(yna.co.kr)
14. Clinical
Serum Therapy: Benefits, Cautions, and Potential Applications(https://www.ncbi.nlm.nih.gov/pubmed/28450682).
15. Serum
therapy, especially in its application against diphtheria(http://www.animalresearch.info/en/medical-advances/nobel-prizes/serum-therapy-especially-its-application-against-diphtheria/)
16. Wikipedia
출처: 디아트리트 VOL. 19 NO.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