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구안)와사풍’에
걸렸다며 신경과 진료실을 찾는 환자들을 종종 본다. 이 어려운 이름이 무슨 뜻인가 찾아보니 ‘구(口)+안(眼)+와(喎)+사(斜)+풍(風)’이란 글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찬기운이 원인이
되어 입과 눈이 비뚤어지는 병’이란 의미라 한다. 신경과에서는
간단히 ‘벨 마비(Bell’s palsy)’라고 부른다. 벨은 이 병을 기술한 의사 챨스 벨(Sir Charles Bell
KH FRS FRSE FRCSE MWS; 1774~184)의 이름이다.
의료계에는 벨 성(姓)을 가진 의사들이 꽤 많다. 가장 유명한 벨은 아마도 셜록 홈즈의
모델이 되었던, 에딘버러 의대 외과의 조셉 벨(Joseph Bell;
1837~1911) 교수가 아닐까? 일찍이 그의 제자였던
아서 코난 도일(Sir Arthur Conan Doyle; 1859~1930)이 죠셉 벨 교수의 꼼꼼한 관찰력에 감명을 받아 셜록 홈즈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창조했으니까. 그렇다면 죠셉과 챨스는 집안 사람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하지만 같은 고향 사람이긴 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찰스는 홈스쿨링을
그만두고 에든버러의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에든버러 의대를 졸업해 의사가 되었다. 찰스는 외과의로 일하는 11세 터울의 형 존(John Bell)에게 수련을 받아 외과의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
형제는 일도 열심히 하고 해부학 연구도 열심히 해서 공동으로 『A System of
Dissection Explaining the Anatomy of the Human Body』란 해부학 책을 집필했다. 해부학 책 속의 그림은 동생 찰스가 그렸다.
형 존은 에든버러 의대병원, 챨스는 에든버러 왕립 진료소에서 외과의로 일했지만 지역 의료계와 불화를 겪어 장래가 불투명해졌고, 하는 수 없이 찰스와 존은 에든버러를 떠나 런던으로 갔다(1804년).
런던에서는 의사가 아닌 화가로 이름을 알리기는
했지만 의과의로서 일자리는 얻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낡은 집을 얻어 형과 함께 해부학과 미술을 가르치는
교습소를 차려 생계를 꾸려나갔다(당시 영국의 의사들이나 의대생들은 해부학을 사설 교습소에서 개인적으로
배워야 했다).
이렇게 5년을
보낸 후인 1809년에 찰스 벨은 포츠머스(Portsmouth)로
가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일자리를 얻었다. 당시 영국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과 전쟁을
벌이던 상태였다. 벨은 그곳에서 총상 환자들을 많이 치료했는데, 이
때 신경을 다친 부상병들을 많이 접했다. 이것을 계기로 당시로는 미개척지나 다름없는 신경 해부학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벨은 척수의 앞뿔(anterior horn)은 감각을, 뒷뿔(posterior horn)은 운동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밝혔고(나중에
Bell-Magendie law로 불림), 뇌
해부학 책 『An Idea of a New Anatomy of the Brain』을 냈다(1811년). 뇌신경(cranial
nerves) 중 삼차신경(trigeminal nerve)은 얼굴의 감각을, 안면신경(facial nerve)은 얼굴 근육의 운동을 맡는다는
사실도 그가 처음으로 확인했다.
1811년에 벨은 결혼을 했고, 아내의 지참금 덕분에 형편이 나아지자, 헌터 의학교(Hunterian Medical School; the Great
Windmill Street School of Medicine)의 경영진으로 합세한다. 헌터
의학교는 의사이자 해부학자인 윌리엄 헌터(William Hunter)가 세운 역시 사설 해부학 교습소였다. 월리엄 헌터의 형 존 헌터(John Hunter) 역시 유명한 외과의였고, 헌터 형제들 역시 벨 형제처럼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다. 이 교습소는
나중에 런던 킹스컬리지(King’s College London)으로 흡수 통합될 정도로 명망있는 교육기관이었다.
1814년에는 마들섹스병원(the Middlesex Hospital)에
외과 스탭으로 자리를 얻었고, 이듬해인 1815년에는 워털루
전투에 종군했다. 워털루에서 8일 동안 벨은 수백 명의 부상병들을
수술했고, 동시에 해부학 연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824년에는 런던 외과의사 협회(the Royal College of
Surgeons in London; 약칭RSC이다. 왕립
의대로 오해하면 안되고 의사 협회로 봐야한다.)에서 해부학과 외과학 교수를 맡았고, 1828년에 헌터의학교가 런던 킹스컬리지(King’s College
London)으로 흡수 통합되자 대학의 첫 생리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고향에서 쫓겨나 무작정 상경한 후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이제 남부러울 것 없는 지위를 누리게 되었지만 벨은 2년 만에 사임한다. 대학의 관료주의에 염증을 느낀 탓으로 전한다.
하지만 61세에(1835년)에 모교인
에든버러 의대의 외과 과장으로 초빙되어 32년간의 런던 생활을 정리하고 금의환향한다. 말년에는 협심증을 앓았던 벨은 1842년 봄에 여행 도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아 생전에 야외 스케치를 다녔던 곳으로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목초지 인근의 교회
묘지에서 영원히 잠들고 있다. 지금도 찾아가볼 수 있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얼굴 반쪽이 마비되면
금새 눈에 띄기 때문에 안면마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알려진 병이다. 하지만 그 정확한 기전을 처음으로
밝힌 이가 바로 찰스 벨이다.
벨은 외과의사로 외상 환자를 많이 다루었는데, 총상이나 소뿔에 받혀 안면신경을 다친 환자가 얼굴 감각은 멀쩡하면서도 운동 마비만 생기는 것을 관찰하여 3가지 사례를 정리, 1829년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더하여 벨은, 눈을 감으면(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안륜근을 수축시키면) 안구가 반사적으로 상방 및 외방으로 향하는 현상인 ‘벨 현상(Bell’s phenomenon)’도 발견했다. 벨 현상의 생리적
의미는 눈앞으로 갑자기 나타난 위협에 대해 반사적으로 안구를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palpebral
oculogyric reflex).
하지만 벨 현상은 눈이 감긴 채 일어나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볼 수 없다. 눈을 제대로 감을 수 없는 ‘벨
마비’ 환자들에게서만 볼 수 있다. 물론 벨이 처음 발견했다.
1. 삽화로 보는 수술의 역사/쿤트
헤거 지음/김정미 옮김/이룸/2005
2. 의학명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김옥화
지음/여문각/2006
3. Neurological
Eponyms/editted by Peter J Koehler, George W Bruyn, John MS Pearce/Oxford/2000
4. The
Neurologic Examination, 5th Ed/Russell N Dejong/Harper & Row/ 1879
5. Great
Ideas in the History of surgery/Leo M Zimmerman, Ilza Veith/the Williams &
Wilkins Company/1961
6.
Charles Bell (1774–1842)/J. van Gijn/ J Neurol. 2011 Jun; 258(6): 1189–1190.
7. http://www.familypursuit.com/genealogy
8. wikipedia
스코틀랜드 현지에서 입수한 관련 자료 및 사진으로 집필에 도움을
주신 동아대학교 신경과학교실 김종국 교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