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킨슨병 이야기

2015-06-01 17:59:08

박 지 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
신경과 전문의
<
메디컬 오디세이> 저자
한미수필문학상 수상 (2006, 2007)

 

 

 

 

파킨슨병 이야기

 

 

2014년 여름, 미국 영화배우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 1951~2014]가 자살했다. 외신은 그가 파킨슨병을 앓았고, 우울증으로 자살했다고 전했다.

<굿모닝 베트남>, <죽은 시인들의 사회>, <미세스 다웃파이어> 등에서 보여준 긍정적이고 활기찬 인상을 남긴 그의 자살 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필자에게는 특히 <사랑의 기적(Awakenings; 1990)>에서 파킨슨병 환자들을 열정적으로 치료하는 신경과 의사 역할을 맡았던 그의 연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사랑의 기적>은 파킨슨병 역사에서 중요했던 어떤 사건을 그린 영화이기도 한데, 이번에는 영화 <사랑의 기적>과 그 기적을 이룬 아주 특별한 약, 그리고 아주 오래된 질병, ‘파킨슨병’에 대해 알아보자.

 

 

특이한 의사 파킨슨

 

파킨슨병에 이름을 남긴 제임스 파킨슨[James Parkinson; 1755~1824] 18세기 말~19세기 초에 활동한 영국의 의사다. 런던에서 약사(apocathery)겸 서젼(surgeon)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부터 외과술(surgery) 교육을 받은 후 아버지의 도제로 6년을 수련한 다음 29세에 정식 서젼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서젼은 닥터(doctor = physician)보다 한 등급 아래였다.

파킨슨이 사회인이 되었던 그 시절 영국은 격변기였다. 아메리카의 식민지는 미국으로 떨어져 나갔고(1776), 프랑스에서는 혁명(1789)이 있었다. 프랑스는 국왕이 참수되고 공화정(共和政)이 선포되었다. 나폴레옹은 공화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유럽의 전제군주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바다 건너에 고립된 섬이었지만 영국 국왕도 프랑스와 일전을 준비해야 했다. 그 와중에 백성들은 과중한 전쟁 부담을 짊어져야 했고, 삶은 도탄에 빠져갔다. 그러면서 대륙의 ‘불온한’ 기운이 영국에도 퍼져갔다.

청년 파킨슨은 새로운 정치 사상을 적극 지지했고, 시민계급의 권리 신장과 국민들의 참정권을 주장하는 비밀 결사체의 행동대원으로도 활약했다. 1794년에 국왕 암살 사건이 미수로 그쳤고, 조직원들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으로 소환되어 심문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로는 10년간의 정치 활동은 그만두고 의업의 길로 복귀하였다. 통풍과 충수염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반 대중들을 위한 의학서적들을 연작으로 발표했다. 여러 언어에도 능통했고 한편으로는 속기술(速記術)을 익혀 전설적인 서젼인 헌터[John Hunter]의 강의를 속기로 남겨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사회 개혁가에서 작가로 변신한 것이다.

하지만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정신병원의 개혁이나 감옥의 환경 개선을 위해서도 꾸준히 노력했다. 말년에는 자연과학자의 길을 걸어 고생물학과 지질학 연구에 몰두하였고, 1824년에 74세의 나이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동시대 사람에게 파킨슨은 고생물학자, 의학 저술가, 화학 핸드북 저자, 사회 개혁가로도 더 유명했다. 물론 우리 같은 의사들은 단지 그의 이름이 붙은 병 때문에 그를 기억하지만 말이다.

 

파킨슨은 62(1817) 때 『An Essay in the Shaking Palsy』란 논문을 통해 그가 관찰한 특이한 증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Involuntary tremulous motion, which lessened muscular power, in parts not in action, and even when supported; with a propensity to bend the trunk forward, and to pass from a walking to a running pace; the senses and intellects being uninjured.”

 

 

 

파킨슨은 떨림, 근육 마비, 구부정한 자세, 종종걸음이 특징인 ‘shaking palsy’를 같은 뜻의 라틴어를 이용해 ‘paralysis agitans’라 명명했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진전마비(振顫痲痺)로 번역했다.

이 논문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40여 년이 지난 1861년에 파리에서 활동했던 의사 샤르코[Jean-Martin Charcot]가 재발견했다. 샤르코는 환자들을 관찰한 후 마비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 후 ‘paralysis agitans’를 ‘파킨슨병(Parkinsons disease; de maladies de Parkinson)’으로 고쳐 불렀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어디에 생긴 병인가?

 

증상만을 관찰했던 파킨슨은 병의 원인은 알지 못했다. 재발견자인 샤르코는 일종의 신경증(neurosis)이라 주장했다. 병리학 연구를 통해 소뇌, 대뇌의 기저핵(basal nucleus), 중뇌의 흑질(substansia nigra)들이 발병지로 각축을 벌이다가, 1925년에 흑질에 생긴 변성이 파킨슨병의 원인이라는 병리론으로 정리가 되었다. 흑질 병리론의 확립에는 지금은 사라진 기면성 뇌염(Encephalitis letargica)의 역할이 컸다.

폰 에코노모 뇌염(von Economos encephalitis), 혹은 수면병(Sleeping sickness)으로도 불리는 이 특이한 질병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5년에 유럽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가 10년 만에 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후 돌연 사라져버린 정체불명의 뇌질환이었다.

환자들은 발열과 의식 저하 같은 뇌염 소견에 더하여 안구운동 마비를 보였다. 사망률은 40%였고, 생존자의 50%는 파킨슨병 증상을 보였다.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신경학자 폰 에코노모가 처음으로 보고하면서 대뇌의 광범위한 손상과 더불어 중뇌의 흑질에 생긴 이상을 같이 보고했다. 이후로 기면성 뇌염-흑질 변성-파킨슨병의 연결고리가 재차 확인되었고, 1925년에 파킨슨병의 흑질 병리론이 확립되었다.

왜 파킨슨병에 걸리는 걸까? 흑질이 저절로 망가져 생기면 ‘특발성 파킨슨병(idiopathic Parkinsons disease; IPD)’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다른 원인들도 있다. 100년 전에 유행했던 기면성 뇌염, 1950년대에 도입된 정신병 치료제, 그 이후로 일산화탄소, 청산가리, 독성 화학물질 MPTP, 망간, 뇌종양, … 등이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게 다른 원인이 있다면 ‘2차성 파킨슨병(secondary parkinsonism)’으로 구분한다.

 

 

치료는 어떻게 하게 되었나?

 

증상에서 병리까지 아는 데 100년이 넘게 걸렸고 다시 치료법을 알아내는 데는 40년이 더 걸렸다.

19세기 말에는 항콜린성(anicholinergic) 약물로 ‘떨림’을 줄여 줄 수는 있었다. 한편으로는 ‘경직’을 없앨 요량으로 암페타민(amphetamine) 같은 뇌자극제를 처방했다. 뇌의 일부를 잘라주는 과격한 수술도 해보았다. 약은 부작용이, 수술은 사망률이 너무 높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60년에 비인 대학교 연구팀은 흑질에서 분비하는 물질이 도파민(dopamine)이며, 파킨슨병 환자들은 도파민이 부족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렇다면 도파민을 보충해주면 되겠군! 이론적으로는 가능했지만 정작 도파민 보충요법의 효과는 미심쩍었다.

도파민이 우리가 먹은 만큼 뇌에 잘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7년에 코치아스[G Cortiaz]는 뇌-혈류 장벽(BBB)을 통과해서 뇌의 도파민 농도를 올려 줄 수 있는 전구물질 레보도파(levo-dopa), 그것도 기존의 양보다 1,000배나 많은 대용량을 시도했다. 환자들은 극적으로 나아졌다. 지금도 여전히 이 방법대로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영화 의 숨은 이야기

 

 

 

코치아스의 성공으로 이제 임상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할 그 무렵인 1969, 뉴욕의 한 병원에서 레보도파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한 이중맹검 임상시험이 시도되었다. 병원에는 1차 세계대전 무렵에 걸린 기면성 뇌염의 후유증으로 ‘계속 자고 있는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경직된 ’80명의 환자들이 있었다. 환자들을 맡고 있던 올리버 색스[Oliver Sacks]는 영국 출신의 신경과 의사로 1966년부터 이 병원에서 일해왔다.

1969년 봄부터 여름까지, 약을 먹은 환자들 중 50명이 거짓말처럼 깨어났다(AWAKENG)!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반응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어서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고, 환자와 보호자들에게도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약을 계속 써나가자 환자들은 행동 이상, 감정 폭발, 흥분, 과민, 망상 같은 부작용을 겪기 시작했다. 색스는, 레보도파의 효과는 짧은 밀월(蜜月)이 지나면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켜 환자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는 관찰 내용을 미국의학협회(AMA) 학술지에 투고했다(Oliver Sacks, et. Al. Long-term effects of levodopa in the severely disabled patient. JAMA 1970;213(13);2270).

이 편지는 파문을 일으켰다. 어렵게 찾아낸 신약 레보도파에 대한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한 비판을 받았고, 다른 주요 학술지들은 그의 논문을 게재하지도 않았다.

1972년에 영국 BBC에서 발행하는 잡지 <리스너(Listner)>는 색스의 이야기를 실었다. 20세기판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야기는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색스는 자신의 관찰을 학술지 대신 『Awakenings』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1973).

1990년에는 같은 이름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로빈 윌리엄스와 로버트 드니로가 각각 의사와 환자 역을 맡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랑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는데, 사랑이 아닌 ‘약물의 기적’이 좀 더 내용과 맞을 것이다.

레보도파를 먹고 환자들이 기적처럼 깨어났고 곧 피할 수 없는 부작용을 겪는 것을 지켜본 색스의 관찰은 옳았다. 지금도 파킨슨병에 레보도파를 처방하는 의사들은 약이 보여주는 마술과 한계를 잘 알고 있다. 처음에는 극적으로 환자를 호전시키다가 몇 년이 지나면 피할 수 없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나중에는 약물에 대한 초민감성(supersensitivity)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약을 처방한다.

올리버 색스는 여러 권의 책을 남겼고, 일부는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책도 몇 권이나 된다. 그는 평생을 ‘환자가 머무는 풍경’을 그리려 노력했다. 『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사나이』, 『 화성의 인류학자』 등은 의사가 무심히 흘려버리는 병원 밖의 삶, 질병과 공존하는 일상의 ‘풍경’이 잘 드러나고 있다.

2015 2, 82세의 색스에 대한 기사가 매체에 실렸다. 의료계의 계관시인으로 불리는 저명한 의학자가 죽음을 앞둔 편지를 공개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몇 년 동안 암으로 고생을 해왔고, 이제 정말 죽음이 눈앞까지 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죽음으로 가는 자신의 삶의 여정을 글로 남길 것이라고도 한다. 올리버 색스는 죽어가면서도 평생 그가 했던 일, 질병과 공존하는 삶의 ‘풍경’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그 풍경이 고통스럽지 않고 평안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출처]디아트리트 VOL.15, 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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