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지 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
신경과 전문의
<메디컬 오디세이> 저자
한미수필문학상 수상 (2006년, 2007년)
뭉크의『절규』
2012년 5월, 뉴욕의 소더비 경매장에서 뭉크의 『절규[Scream]』가 1억 2천만 달러로 낙찰되어 경매 사상 최고가의 그림으로 등극했다(경매가 아닌 비공개로 매각된 그림들까지 포함하면 그림값으로는 역대 4위에 해당한다).
뭉크는 모두 4점의 『절규』를 그림으로 남겼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국립미술관[the National Gallery in Oslo](템페라로 그린 1893년 작품)과 뭉크 미술관[the Munch Museum](템페라로 그린 1920년 작품과 크레용으로 그린 1893년 작품)이 3점을 소장하고 있고 유일한 개인 소장본이 이번에 경매에 나왔다.
이 작품은 파스텔로 그린 1895년 작품으로 노르웨이의 사업가가 뭉크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작품이었다. 그는 ‘좀 더 많은 이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경매에 내놓았다고 했다. 경매를 주관한 소더비 경매사[Sotherby’s]는 이 그림은 4점의 『절규』 중 ‘가장 색상이 화사하고 생기가 있는 그림’이라고 전했다.
화사하면서 생기 넘치는 절규라… 이것 참 형용모순적이다. 그러고 보니 『절규』는 유치원생들도 다 아는 그림이지만 그의 삶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도 서로 모순되기는 하다. 그래서 “뭉크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뭉크는 평생을 죽음과 질병으로 고통 받았고, 온갖 두려움으로 신경과 정신에 병을 앓았던 환자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들은 그의 두려움과 고통이 잘 드러나 있어 그림 자체가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만약 두려움과 공포를 이해하고 그의 그림들을 본다면 유치원생이나 그릴 법한 조악한 그림이지만 그 속에서 인간 내면의 두려움과 고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100년 전에 살았던, 『절규』보다 더 절절했던, 위대한 화가 겸 심각한 환자였던 뭉크의 삶과 그림에 대해 알아보자.
뭉크의 삶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는 1863년에 의사인 크리스티안 뭉크와 아내 레우라 카트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 살 위로 누나 요한네 소피가 있었고, 아래로 안드레아스, 레우라, 잉게르 이렇게 세 명의 동생이 더 태어났다. 에드바르가 다섯 살 때, 막내 잉게르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모친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정하지만 수줍음이 많았고 독서광이었던 아버지는 아내의 죽음으로 그 자신이 우울증에 걸려 엄마를 잃은 가여운 아이들을 잘 보듬어 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너희들을 늘 지켜보신다.”라며 어린 자식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알란 포[Edgar Allan Poe]의 괴기스러운 소설들을 탐독하던 아이들은 삶과 죽음이 구분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훗날 뭉크는 “질병과 광기와 죽음은 내 요람을 지켰던 천사였고, 그때부터 나를 평생 따라 다녔다. 일찍이 나는 인생의 고통과 위험, 내세, 지옥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는 영원한 형벌에 대해 배웠다. … (중략) … 아버지는 불안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우리와 장난치며 놀았다. 우리를 혼낼 때에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폭력을 휘둘렀다. … (중략) … 나는 어릴 적에 내가 늘 부당한 대접을 받고 엄마도 없으며 몸은 아프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지옥 벌의 위협을 받는 느낌이었다.”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나마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던 카렌 이모가 아이들에겐 작은 위안이 되었다. 에드바르가 열다섯 살 때, 가장 좋아했던 누나 소피마저 어린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 큰 충격을 받았다. 뭉크가 남긴 몇 편의 그림, 특히 병중에 있는 어린 소녀 그림은 누나를, 병중에 있는 여인은 모친에 대한 회한을 그린 것이다. 사랑하고 의지했던 이 두 여인의 죽음과 그때 겪었던 배신감은 이후로 그가 이성을 사귀는 데 크나큰 장벽이 되었다.
열일곱 살 때, 기술자가 되라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해 오슬로 디자인 학교에 진학하여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었다. 이 무렵의 그림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은 누나 소피의 모습을 그린 『병든 아이 (1885~1886)』였다.
차츰 재능을 인정받던 뭉크는 스물여섯에 파리에 유학을 떠났는데, 한 달 만에 파리의 한 카페에서 부친의 부고를 받는다(1889년 가을). 부친은 그가 신앙인으로 회두하라는 의미로 성경책을 유품으로 보냈지만 그는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았다.
하지만 자유분방하게 살지는 못했다. 어려서부터 결핵, 기관지염, 류마티스염을 달고 살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신경쇠약, 알코올 중독, 정신병을 앓았다. 양친으로부터 육체적, 정신적 병질을 골고루 물려받았던 뭉크였다.
인간적으로도 불행한 삶이었다. 성인이 되었지만 여성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연애는 번번이 좌절과 상처만 남겨주고 파탄이 났다. 덕분에 여성이란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존재, 생명을 단축시키는 악마의 유혹 정도로 여겼는지 평생 미혼으로 지냈다. 뭉크의 그림 속에는 자신의
여인들뿐만이 아니었다. 낯선 이를 두려워했고, 가족을 일찍 데려간 질병과 죽음을 두려워했다. 텅 빈 공간을 무서워했고 혼자 남겨지는 것을 싫어했다. 45세에는 정신병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코펜하겐의 야콥센 교수의 개인 클리닉에 입원하였다. 8개월 동안 전기치료, 식이요법, 마사지요법을 받아 회복되어 1909년 봄에는 17년의 외유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노르웨이에서 여생을 보내며 술도 끊고, 친구들도 사귀고, 고향의 산천과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하지만 그림은 이전만 못하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1919년에는 대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1930년과 1938년에 심한 눈병(안구 출혈)을 얻어 거의 실명 위기까지 갔었다. 같은 시기에 자신이 많은 영향을 끼쳤던 독일에서 나찌가 득세하며, 뭉크는 ‘퇴폐 예술가’로 낙인찍히고 자신의 작품들이 몰수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1940년에는 나찌가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오슬로에 입성하자 그림들이 몰수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지냈다.
1944년 1월, 나찌 치하의 고국 땅에서 뭉크는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유화 약 1천 점, 판화 1만 5,400점, 수채화 및 드로잉 450점, 조각 6점은 유언에 따라 오슬로 시에 기증되었고, 1963년에 문을 연 뭉크 미술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내면을 표현하라!
뭉크는 어느 특정한 유파에만 속한다고 보기 어려운 화가다. 초기의 작품들은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자연주의적’이었다. 파리 유학 시절에는 ‘인상파’ 화가들을 좋아했고 그 영향을 받았다. 나중에는 투박하고 강렬한 ‘표현주의’ 경향을 보였는데 이 영향을 크게 받은 유파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표현하고 싶어 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중요한 사건을 통해 느꼈던 ‘느낌’이나 ‘내면적 심리 상태’였다. 대상은 단순화되면서 왜곡되어 투박해 보였고 색이 그 자리를 메웠다. 이상하게 보이기까지 한 그림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실마리는 인물이 보여주는 정서, 배경이 보여주는 분위기다. 그래서 그림들을 들여다보면 그의 삶과 영혼의 이력이, 자신의 삶에 대한 정서적 해석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그가 목격했던 모친과 누이의 죽음은 많은 작품 속에서 반복적인 모티프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죽음과 삶에 대한 그의 해석,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데 따른 연민과 배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 역시 많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데 일부에서는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결합하기도 했다.
그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보다는 ‘기억해 내어’ 그리길 좋아했다. 기억이란 과장되거나 생략되면서 정서적인 색채를 가지는 것이기에 자연히 과거에 대한 자신의 ‘정서적 해석’이 배어들었다. 이런 회상화들은 특이하게도 당시의 시공간을 유지하지 않고 묘하게 비틀린 경우가 많다. 배경은 과거지만 인물들은 현재의 모습인 경우도 있다. 살아 있는 여동생의 모습을 그렸지만 그녀를 낳고 곧 죽어버린 모친에 대한 연민이 드러나기도 했다. 시공간을 초월하고 비틀린 느낌,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들은 그저 ‘꿈’에서나 경험하는 일이다.
절규
『절규』도 그런 관점으로 보면 어떨까? 1893~1910년 사이에 그려진 4점의 『절규』는 어느 석양의 기억을 바탕으로 그렸다고 한다.
친구들 둘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핏빛 하늘에 걸린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와 피오르[fjord]에 걸린 칼을 보았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Geschrei(독일어); Skrik(노르웨이어); Scream(영어)] 소리를 들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배경이 되는 하늘은 수평이고, 난간은 급격한 사선으로 다가오고, 피오르는 곡선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먼 하늘은 아름다운 노을이 아니라 핏빛 구름이 굽이쳐 공포스럽고, 다리 난간의 급한 경사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이 사선과 대비되는 피오르의 굽이치는 곡선은 여성의 긴 머리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세히 보면 그림 속의 이상한 인물은 비명을 지르고 있지 않다. 핏빛 하늘이, 흔들리는 피오르가 비명을 지르고 있고 그 소리를 들은 인물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는 표정일 뿐이다. 그래서 화가 자신이 붙인 원래의 이름은 독일어로 『Der Schrei der Natur (The Scream of Nature: 자연의 비명)』다. 하지만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저 해골 같은 인물의 입에서 나오는 비명을 듣는다. 자연을 대신해 인물이 비명을 질러주는 것처럼…
『절규』를 이해하는 단서가 하나 더 있다. 그림의 장소적 배경이 되는 곳은 동부 피오르 해안의 리야브로베이엔으로 추정된다. 수려한 경관으로 화가들이 풍경화를 그리던 곳이었지만 그 아래에 정신병원이 있어 종종 환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단다. 또한 근처에는 도살장도 있었고, 뭉크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은 근처에서 자살을 시도한 곳이기도 하다. 심약했던 뭉크가 여러 가지 이유로 극단적인 우울감이나 공포감에 빠질 수 있는 곳이었다.
이 하나의 작품만으로도 뭉크는 충분히 유명해졌지만 이 그림은 어느 순간에 불쑥 튀어나온 영감으로 그려진 그림은 아니었다. 파리 유학 시절에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1889)』, 『트랑크테이유의 다리 (1888)』,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에서 보이는 가파른 구도와 물결치는 하늘이 『절규』에서도 보인다. 구스타브까미유보뜨[Gustav Caillebotte]의 그림들도 『절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절규』는 여러 화가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 세상에 나온 그림이다.
『절규』가 세상에 나왔을 때 비평가들이나 일반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비평가들은 화가의 ‘기본기’를 의심했고, 일반인들은 ‘광기’가 옮을 것 같은 그림을 끔찍이 여겼다. 다만 정신분석가들은 ‘현대인의 억압된 공포’를 그려낸 것이라며 작가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다.
하지만 노르웨이이의 수집상 올라프 수는 이 그림에 숨은 가치를 보았다. 1901년에 뭉크의 빚을 갚은 조건으로 오슬로 갤러리에서 『절규』와 몇 점의 그림을 구입했다. 수는 1909년에 『절규』를 오슬로에 있는 국립미술관에 기증했고, 해외 대여 전시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불의의 절도 사건으로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한 3개월을 빼고 말이다.
1994년 2월 노르웨이의 릴레함메르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렸다. 전 세계의 이목이 이곳으로 집중된 가운데 노르웨이 경찰력의 1/3도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이 와중에 국립미술관의 경비는 느슨해졌고, 틈새를 노린 절도범들이 미술관에 들어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절규』를 20분 만에 훔쳐 나왔다.
그림 도난 소식은 마침 노르웨이에 모여 있던 기자들의 입을 타고 전 세계에 전해져 『절규』가 아주 유명해지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람들은 절도 당한 그림이 궁금해서 그 자리에 붙여 놓은 모사본을 보기 위해 미술관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귀한 그림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자신들의 안목을 탓했다.
그사이 절도범들은 그림값으로 1만 달러(2012년의 경매 가격은 1억 2천만 달러 아닌가!)를 요구했지만 미술관은 거절했고 국제적인 공조 수사를 통해 한 달 반 만에 『절규』는 안전하게 미술관으로 되돌아왔다. 그림이 되돌아오자 이전보다 서너 배 많은 관람객들이 『절규』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전한다.
2004년 8월에는 무장 복면 강도들이 뭉크 박물관에 있던 또 다른 『절규』와 『마돈나』를 뜯어갔다. 이번에는 회수가 쉽지 않아 2년이 지나서야 『절규』를 되찾았지만, 보관 상태가 나빠 그림의 일부가 망가진 채 돌아왔다. 전문가들이 매달려 장장 4년 동안 훼손된 그림을 복원하여 다시 일반에 공개할 수 있었지만 아직도 그 상처가 남아 있단다.
2012년 봄에 뉴욕에서 경매된 『절규』를 구입한 사람은 미국의 억만장자 레온 블랙[Leon Black]이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볼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던 판매자의 의견을 존중했던지, 이 그림은 지난 가을부터 올해 4월 말까지 뉴욕 현대미술관에 대여 전시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가장 비싼 경매가로 팔린 『절규』를 보러 뉴욕 현대미술관을 방문하고 있다. 그전까지 이 미술관에서 가장 인기 높았던 그림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는데 『절규』 때문에 찬밥이 될 정도란다. 사람들은 『절규』의 예술성을 더 높이 쳐서 그럴까, 아니면 고흐보다 더 파란만장했던 뭉크의 삶에 대해 매력을 느껴서 그럴까? 아니면 그림 그 자체보다는 그림의 물질적 가치나 언론의 주목성 때문인지 모른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도 내 눈으로 직접 『절규』를 보고 싶다. 아니, 그 앞에 서서 뭉크가 들었다던 자연의 외마디 비명에 한 번 귀기울여보고 싶다.
[출처]디아트리트 VOL.13, N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