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료가 거센 격랑을 지나고 있는 현 시점에 국제 의사사회를 대표하는 회장 자리에 한국인 의사가 올랐다. 고대안암병원 신경외과 박정율 교수가 그 주인공으로, 아시아 최초로 세계의사회 의장직과 회장직을 동시 역임하게 됐다.
본격적인 회장 임기는 오는 10월부터 1년이지만 이미 차기회장으로 1년간의 활동을 시작했으며, 임기 종료 후에도 직전회장으로 1년을 수행한다. 사실상 3년에 걸쳐 세계 의료계의 의제와 방향을 조율하는 중책을 맡게 된 셈이다.
대한의사협회 출입기자단과의 인터뷰에서 세계의사회 박정율 차기회장은 “기쁨보다 책임감이 더 크다”고 소감을 밝혔다. 의료의 전문적 자율성과 윤리, 그리고 글로벌 보건 의제를 둘러싼 논의가 격화되는 가운데, 박 차기회장이 이끄는 세계의사회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할지 주목된다.
◆세계의사회 차기회장 당선에 축하드립니다. 한국 의료계가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시련을 겪는 상황이라 어깨가 더욱 무거울 것 같은데, 당선소감과 함께 이번 선출이 한국 의료계와 국제 사회에 갖는 의미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세계의사회 차기 회장으로 선출돼 정말 영광스럽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다만 지금 한국 의료가 여러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보니, 기쁨보다는 책임감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선출은 저 개인의 영예라기보다는, 대한의사협회와 우리나라 의사들이 국제사회에서 그동안 해 온 역할과 노력이 함께 인정받은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한의사협회는 1949년 세계의사회에 가입한 후 오랜 기간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세계의사회 운영과 주요 논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특히 1985년에는 고(故) 문태준 회장님께서 세계의사회 회장으로 취임하시며 한국 의료계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이셨고, 그 이후에도 대한의사협회는 꾸준히 이사국으로 참여하며 주요 정책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참여와 기여가 쌓여 다시 한 번 우리나라에서 세계의사회 회장이 선출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선출은 한국 의료계가 겪고 있는 현실과 고민이 더 이상 국내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국제사회와 함께 논의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 사안임을 보여주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의료의 전문성과 윤리를 지켜온 한국 의료계의 경험은 국제사회와 공유하고 논의할 가치가 크다고 보며, 동시에 국제사회의 다양한 시각과 연대를 통해 한국 의료가 나아갈 방향을 함께 모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도 생각합니다.
앞으로 세계의사회 회장으로서 각국 의료계와 긴밀히 협력해 글로벌 보건의료 과제에 대응하는 한편, 한국 의료가 안고 있는 현안과 문제 역시 국제사회에 정확하게 전달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 의료가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국제적인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18개국 의사협회를 아우르는 세계의사회가 글로벌 보건의료 생태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하며, 의사 결정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세계의사회는 전 세계 1100만명 이상의 의사를 대표하는 각국 의사협회의 국제적 연합체로, 2026년 현재 118개국 의사회가 정회원으로 가입해있습니다. 의료와 윤리, 의학교육은 물론 건강과 관련된 인권 전반에 걸쳐 가능한 한 최선의 국제적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전문가적 자율성과 외부 영향을 받지 않은 독립적 임상 진료를 보장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미션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련된 기준들은 각국의 의료 정책과 제도, 그리고 실제 임상 현장에서 중요한 준거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세계의사회는 매년 약 20~30개의 주요 의료정책을 개발하고, 그 중요도와 시급성에 따라 성명서, 결의안, 선언문 등으로 구분해 발표합니다. 이러한 문서들은 국제적으로 합의된 의사사회의 공식 입장으로, 각 회원국이 자국의 의료 정책과 제도에 반영되는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됩니다.
최종 의사결정은 회원국 의사협회 대표들이 참여하는 총회에서 이뤄집니다. 총회에서는 상정된 각 안건에 대해 개별 투표를 통해 채택 여부를 결정하며, 안건은 채택되거나 추가 검토를 위해 이사회로 환송되거나, 또는 폐기될 수 있습니다. 총회는 매년 10월 정기적으로 개최됩니다.
총회에 상정되는 안건은 주로 이사회를 통해 제출됩니다. 준회원회의와 젊은의사네트워크 (JDN, Junior Doctors Network) 역시 총회에 안건을 직접 상정할 수 있어, 다양한 세대와 직역의 목소리가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당선 자체가 세계의사회 내에서 높아진 한국 의료계의 위상을 방증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118개 회원국 사이에서 한국 의료계의 실질적인 영향력과 위치는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서구권 중심의 의료계 리더들은 한국 의사들의 역량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세계의사회 내에서 대한의사협회는 오랜 기간 이사국이자 핵심 회원국으로 활동하며, 주요 정책과 윤리 논의 과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습니다. 118개 회원국이 함께하는 조직에서 한국 의료계는 단순히 지역 대표성을 넘어, 실제 논의의 방향과 내용에 기여하는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에서 바라보는 한국 의사와 한국 의료는 이제 문화적 영역을 넘어 ‘K-medicine’이라는 이름으로 전문성과 신뢰와 함께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의료 인프라와 의료 수준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과거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다른 국가를 지원하는 위치로 전환한 매우 드문 사례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서구권 중심의 의료계 리더들에게도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한국 의사들은 높은 진료 역량과 함께 변화하는 의료 환경에 빠르게 대응해 온 집단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OECD 지표에서 나타나는 환자 진료량과 국민 건강 수준 역시 한국 의료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근거로 자주 언급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의료계는 국제사회에서 충분한 신뢰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위상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참여와 책임 있는 역할 수행을 통해 지켜가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세계의사회의 ‘헬싱키 선언’이나 ‘제네바 선언’ 등은 각국 의료정책과 윤리기준의 나침반 역할을 해왔습니다. 과거 세계의사회의 결의문이나 활동이 대한민국 의료제도, 의사윤리 강령, 혹은 법 제정 과정에 구체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거나 변화를 이끌어냈던 결정적인 사례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첫 번째로, 2005년 줄기세포 연구 과정에서 난자기증의 윤리성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됐을 때, 대한민국 입법부와 학계가 사실상 유일한 ‘절대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 WMA의 헬싱키 선언이었습니다.
헬싱키 선언에 명시된 ‘피험자의 복지는 과학적·사회적 이익보다 우선돼야 한다’는 원칙이 법 조항에 거의 그대로 반영됐고, 이는 한국의 의학 연구가 속도와 성과 중심에서 윤리와 인권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결정적인 법적·제도적 변곡점이 됐습니다.
두 번째로, 2008년 서울에서 개최된 WMA 총회에서 채택된 ‘의료 전문가 자율성에 관한 서울 선언’은 한국 의료계에 매우 실질적인 기준과 논리를 제공했습니다.
이 선언은 정부 주도의 하향식 의료 정책, 예를 들어 원격의료의 일방적 추진이나 포괄수가제 확대 논의 과정에서, 의료계가 단순한 이해관계자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합의된 원칙에 근거해 대응할 수 있는 근거가 됐습니다.
대한의사협회는 이 선언을 토대로 “국가는 의사의 전문적 자율성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국제적 표준으로 제시하며, 관치 의료를 견제하는 법리적·윤리적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2017년 세계의사회 총회에서 개정된 제네바 선언(현대판 히포크라테스 선언)이 국내 의사윤리강령에 즉각 반영된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당시 개정된 제네바 선언에는 의사의 의무로서 환자뿐 아니라 의사 본인의 건강과 자기 관리에 대한 조항이 새롭게 포함됐습니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를 근거로 전공의 과로 문제, 전공의법 논의, 그리고 의사 인권 보호 정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윤리적·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의 건강이 곧 환자의 안전으로 이어진다는 논리가 사회적 설득력을 얻게 된 배경에는 세계의사회 선언의 개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세계의사회의 헬싱키 선언, 제네바 선언 등 주요 결의문이 단순한 선언적 문구를 넘어, 대한민국의 의료 제도와 법률, 그리고 의사 윤리 기준의 방향을 설정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해왔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10월부터 본격적으로 WMA 회장 임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한국 의료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게 되셨는데, 임기 동안 꼭 이루고 싶은 핵심과제는 무엇이며, 훗날 세계 의료계에 어떤 리더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현재 한국 의료가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마음 한편이 무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세계의사회 회장직은 매우 영광스러운 자리이지만, 동시에 특정 국가의 이해관계나 국내 현안에만 치우칠 수 없는 위치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 의료계의 공통 가치와 원칙을 대표해야 하는 자리인 만큼, 그에 따른 책임과 부담 역시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기 동안 반드시 의미있는 성과를 남기고 싶은 핵심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의사들의 전문적 자율성과 독립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이미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는 이 가치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부 국가에서는 아직 충분히 구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세계의사회 회장으로서, 모든 회원국의 의사들이 정치적·행정적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전문성과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소신 진료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자 합니다. 의사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될 때, 최첨단 의학과 연구개발이 가능해지고, 이는 결국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의료로 이어지며 환자들의 건강과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기반이 된다고 믿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특정 국가들을 대변하는 회장이 아니라, 전 세계 의사들이 최고의 윤리지침과 규범을 바탕으로 전문적 자율성과 독립성을 존중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한 리더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의료가 정치나 이념의 도구가 아니라, 과학과 윤리, 그리고 환자 중심의 가치 위에 설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공감을 이끌어낸 회장으로 남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