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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욱의 medical trivia

박 지 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
신경과 전문의
<
메디컬 오디세이> 저자
한미수필문학상 수상 (2006, 2007)

 

 

 

아프로디테와 결핵 

 

 

 

사진관에 사진 찾으러 갔다가 주인과 손님이 나누는 이야길 들었다. 증명사진 하나를 두고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저렇게… 쉽게 말하면 ‘뽀샵’ 처리를 어떻게 할까 상의 중이었다.

디지털 이미지를 보정하는 모든 소프트웨어의 대명사가 된 ‘뽀샵’은 원래 어도비(Adobe)의 사진 보정 소프트웨어 <포토샵(photoshop)>에서 온 말이다. <포토샵>, <피디에프(pdf)>, <아크로벳 리더(acrobat reader)>로 유명한 어도비지만 하나 더 <일러스트레이터(illustrator)> 역시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소프트웨어다.

IBM 호환 PC PC 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하던 시절, 애플의 매킨토시로, 마우스 몇 번으로 그래픽 작업을 가능하게 한 막강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의 능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도 1990년대 초에 ‘맥’으로 이 프로그램을 몇 번 구동시켜 본 적이 있었다. 마우스로 아이콘을 클릭하면,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먼저 뜨고 그 아래로 “Reading fonts…”라는 자막이 등장하면서 한참을 ‘드르륵드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린다. 좀 기다리면서 모니터를 물끄러미 응시하는데 당연히 여인의 얼굴에 눈길이 머문다.

 

 

 

 

깊은 눈매, 오독한 콧날, 꼭 다문 일술, 가볍게 흩날리는 머리칼, 아름다운 얼굴이다. 무슨 그림일까?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한참을 지나서야 알았다. 그녀는 보티첼리[Sandro Botticell]가 그린 『아프로디테의 탄생(The Birth of Venus, 1486)』에 등장하는 아프로디테였다는 것을…

 

 

아프로디테의 신화

 

 

 

 

 

그리스 신화에는 아프로디테의 탄생에 대한 사연이 나온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Gaea)의 아들이자 남편이 된 하늘의 신 우라누스(Uranus)는 태어나는 자식들이 흉측하다며 땅속에 파묻어 버렸다. 가이아는 아들 크로누스(Cronus)를 시켜 우라노스를 거세했다. 아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우라노스는 깜짝 놀라 달아나다가 그만 남근을 바다에 ‘풍덩’ 빠트렸다. 그때 남근에 남은 생명의 씨앗이 바다 거품을 만들었고, 그 속에서 아프로디테(Aphrodite; 그리스어로 ‘거품(aphros)’이란 뜻)가 태어났다.

바다 한가운데서 태어난 아프로디테는 조가비를 타고 해안으로 떠밀려 갔고 마침내 퀴프로스(Cypress) 섬에 닿아 뭍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바로 그 장면을 보티첼리가 그림으로 남겼다.

보티첼리는 아름다움의 대명사인 아프로디테의 얼굴에 당대 피렌체 최고의 미녀 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Vespucc)를 그려 넣었다. ‘미녀 시모네타(la bella Simonetta)’란 별명으로 불린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많은 화가들도 그녀를 모델로 많은 작품을 남길 정도였다. 덕분에 그녀의 얼굴은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미인의 얼굴로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 했던가? 이 여인은 스물 두 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바로 결핵(tuberculosis) 때문에…

 

 

가벼운 열이 지속되며, 기운이 서서히 빠지고, 뺨은 상기된 채,

광대뼈가 솟아나고, 눈은 휑해지며 산송장이 되어 간다.

 

 

2세기에 활동했던 아레테우스[Areteus de Cappadochia]라는 의사는 결핵 환자들의 얼굴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런 ‘sick face(아픈 얼굴)’는 사람들에게 ‘chic face(매력적인 얼굴)’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근세기까지 결핵에 걸린 환자들은 정욕(情慾)이 넘쳐나고 이성을 유혹하는 비범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뺨이 장미빛으로 물들고, 육체가 연약해지는 것은 모두 결핵 때문에 생기는 미열과 몸이 쇠약해진 결과였지만, 사람들은 좀 낭만적이고도 선정적으로 결핵 환자들을 바라보았다. 더 나아가서 문학이나 오페라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 높이기 위해 약속이라도 한듯 얼굴이 하얀 폐병쟁이로 세상을 하직할 정도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12년 말에 우리 박스오피스를 강타한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여주인공 팡팅도 결핵으로 하얗게 질려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결핵 환자의 마지막 단말마의 고통을 잘 보여주는 영화는 빌 어거스트 감독의 1998년판 『레미제라블』이다)

 

 

 

결핵의 역사

 

 

인간은 언제부터 결핵에 걸렸을까? 고대 이집트인들의 미라에서도 결핵의 흔적이 보인다. 대략 6~7천 년 전부터 결핵은 인간에게 왔다.

2,500년 전에 활동한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당대에 가장 흔하고도 치명적인 병 ‘프티시스(phthisis)’를 섣불리 치료하려 들었다간 ‘명성에 금이 갈 것’이라고 동료들에게 점잖게 충고했다.

로마 시대에는 ‘타베스(tabes)’라 불린 병이 바로 그리스의 ‘프티시스’였다. 영어로는 ‘컨셤션(consumption)’이 되었다. ‘모두 한뜻으로 쇠약(衰弱)해진다’는 의미다. 컨셤션은 몸에 피가 부족해서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페스트(흑사병)만큼 무서운 병이란 의미로 ‘하얀 페스트(white plague)’ 라고도 불렸다. 페스트에 걸리면 피하출혈을 일으키며 죽게 되므로 몸이 시퍼렇다 못해 시커멓게 변한다(黑死病 black death = plague). 하지만 결핵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산소 부족이 생기므로 사람이 창백해 보인다. 페스트처럼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무서운 병이면서 오랜 기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다가 죽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연주창(scrofula, scrofuloderma)’이라는 병도 있었다. (1) 결핵이 목의 임파선에 생기면 서서히 곪아 들어가 피부에 구멍이나 도랑 같은 누공(fistula)이 생기고 염증조직은 치즈처럼 녹아 내린다. 목의 임파선들이 넝쿨처럼 주렁주렁 연결돼 있기 때문에 이런 특이한 모양을 만들었다. 대개는 아이들이 많이 앓는다. 한의학에서는 구슬이 꿰어진 모양이라고 ‘연주창(連珠瘡)’이라 불렀다.

 

  

  

 

 

이 정도의 상태가 되면 주님의 성스러운 권능을 내려받은 임금님만이 환자를 낫게 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에서는 11세기에 참회 왕 에드워드[King Edward the Confessor (1003~1066)]부터 시작해 무려 700년 동안 국왕이 종교적인 행사 때 일종의 안수 의식처럼 환자들을 어루만져 주었다(royal touch). 프랑스에서도 5세기 말, 아주 독실한 기독교 개종자였던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Clovis I] 때부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영국의 찰스 2(재위1660~1685)는 무려 9만 명이 넘는 환자들에게 손길을 베풀었고, 프랑스 앙리 4(재위1589~1610) 5천 명의 환자를 치료(?)했다고 전한다. Evil’이라는 영어 단어는 사악한 힘, 악령들을 뜻하므로 ‘kings evil’은 우리 식으로 하면 ‘나랏님이 책임져야 할 악질’이다(나병이나 뇌전증은 믿음으로 나아지는 병이었다면, 결핵은 임금님의 손으로 낫는 병이라 믿은 것이다).

 

    

 

 

 

이렇게 그 정체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하던 이 질병은 해부학, 병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6~17세기에 질병으로 죽은 환자들을 해부했던 의사들은 이 질병이 허파에서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리학자들은 허파에 보이는 작은 병소(病所)를 ‘작은 결절(tubercle), ‘염증(inflammation)’ 혹은 ‘흉터(scar)’라고 불렀다.

16세기 이후로는 ‘tubercula(튀어나왔다는 뜻)’ 혹은 ‘scirrhositates(딱딱하다는 뜻)’ 로 불려지기 시작했고, 동시대의 프랑스의 유명한 서젼 앙브로와즈 파레[Ambroise Pare]는 라틴어의 ‘tuberculum’을 어원으로 한 프랑스어 ‘La tubercule’로 정했다. 이후로 프랑스에서는 한동안 신체의 표면에 보이는 작은 돌기들은 모두 ‘tubercule’이라 불렀다. 이 영향을 받아 지금도 ‘tuberculosis’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말로는 ‘결핵(結核)’이라고 번역하지만 병리학자들이 폐에서 발견한 병소는 아마 울퉁불퉁한 ‘옹이’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다시 아프로디테의 얼굴로 남은, 결핵 환자 미녀 시모네타의 얼굴로 돌아가 보자. 아름다움의 절정기에 결핵으로 죽은 이 얼굴에도 끔찍한 결핵의 징조가 보일까?

 

 

 

 

 

상기된 장미빛 뺨, 쑥 들어간 눈, 가녀린 눈매, 눈 아래에 보이는 검은 그림자(dark circle), 유난히 길어 보이는 목, 비정상적으로 가파른 어깨선… 이 아름다운 얼굴 속에서 의사라면 결핵의 어두운 그림자를 당연히 찾아내어야 할까?

한창 나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시모네타만의 일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많은 유명인들도 꽃다운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데카르트, 볼테르, 루소, 몰리에르, 쉴러, 스피노자, 로크, 칸트, 키츠, 셀리, DH 로렌스, 알렌포우, 쇼팽, 파가니니, 브론테 자매들(샬럿, 에밀리, 앤은 각각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애그니스 그레이의 저자), 디킨스, 발자크, 휘트먼, 스티븐슨, 도스토에브스키, 체호프, 카프카, 현진건…

 

르네상스 시대와 근대기에 절정을 이루었던 결핵은 다행히 조절되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1920년대에 나온 BCG, 1944년에 등장한 스트렙토마이신과 이후에 등장한 약물들 덕분에 결핵이 퇴치되고 있다고 믿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결핵은 이런 약들이 나오기 전부터 서서히 줄어들었다. 사람들의 경제적 수준이 오르고 잘 먹고 잘 쉬게 되면서부터, 다시 말하면 산업혁명 시대의 극단적인 노동 환경과 최저 생계 수준을 벗어나게 되면서부터(영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민중들이 살던 곳을 기억해 보라) 결핵은 서서히 우리 주변에서 물러났다. 알고 보면 의학이 아니라 영양학의 도움으로(!) 인간은 결핵균에 대한 저항력과 면역력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쉽게 조절되던 결핵은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있다. 20세기 말에 들어 인간의 면역력을 앗아가는 AIDS가 등장하자 결핵의 발병률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젊은이들에게서 병률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한창 공부만 하는 고등학생들이 집단 감염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건강을 해쳐가면서 공부만 해야 하는 상황이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의 일상이 되어버려 별일도 아니게 된 나라! 먼 훗날 후손들은 우리 시대에 다시 번창하는 결핵을 두고 어떤 평가를 내릴지 무척 궁금하다.

 

 

 

[출처]디아트리트 VOL.14, N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