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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욱의 medical trivia

가장 비싼 얼굴의 의사, “가셰의 초상”

박 지 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
신경과 전문의
<
메디컬 오디세이> 저자
한미수필문학상 수상 (2006, 2007)

 

 

 

 

가장 비싼 얼굴의 의사,

 

“가셰의 초상”

 

 

 

 

오베르에서 가셰를 만난 고흐

 

아를(Arles)에서 보낸 꿈같은 시절과 연이은 파탄으로 1년간 정신병원 신세를 졌던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1890 5, 파리 근교의 오베르(Auvers sur Oise)로 이사했다. 오베르에는 우울증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폴 페르디낭 가셰 [Paul Ferdinand Gachet (1828~1909)] 의사가 살고 있었는데, 아마츄어 화가이자 판화가이기도 했다. 고흐의 동생 테오 [Theo van Gogh]는 가셰의 의학적 배경과 예술에 대한 이해심이 화가이자 정신병 환자인 형의 치료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치료를 맡겼다. 가셰와의 관계는 7 29일 고흐의 비극적인 죽음까지 두 달 정도 이어졌다.

가셰는 피사로 [Camille Pissaro]를 치료한 것을 인연으로 세잔 [Paul Cezanne], 모네 [Claude Monet], 르누아르 [Pierre-Auguste Renoir], 마네 [Edouard Manet] 등의 화가들과 친분도 두터웠다. 특히 세잔은 의사와 그의 집을 소재로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고흐 역시 가셰와 그의 가족을 모델로 몇 점의 그림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의사의 초상화가 100년이 지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줄 미처 짐작이나 했을까? 

 

 

 

 

 

 

 

 

 

 

 

 

가셰 의사의 초상

 

 

 

그림을 대충 살펴보면 낡은 해군 모자를 쓰고 군대 구급대의 푸른 제복을 걸친 - 인물의 직업을 암시하는 - 예순 하나의 노인이 테이블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다. 전체적으로 오른편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다. 흩어진 중심은 오른손이 받치고 있다. 하지만 머리를 받쳐주는 오른손의 자세가 상당히 어색해 보인다.

힘이 들어간 몸과는 달리, 우리의 시선을 슬며시 피해 흐트러진 무게 중심의 반대편을 주시하는 노인의 초점을 잃은 눈은 그지없이 우울해 보인다. 고흐는 이런 가셰의 표정을 들어 ‘이 의사는 우리 시대의 암울한 표정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했다.

의사와 환자, 아니 화가와 모델의 우울함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켰는지, 그림은 온통 우울을 상징하는 ‘푸른 색조(blues)’가 가득하다. 다만 고흐의 생명력 넘치는 독특한 노랑 빛깔은 화면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인 듯한 두 권의 책에서나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책들은 『제르미니 라세르퇴 [Germinie Lacerteux (1865)]』와 『마네트 살로몽 [Manette Salomon (1867)]』으로 알려져 있는데 모두 꽁꾸르 형제 [Edmond de Goncourt (1822~1896) and Jules de Goncourt (1830~1870)]가 합작하여 쓴 책들이다. 각각 ‘신경증 환자의 이야기’와 ‘파리의 예술계 이야기’라고 전한다. 두 권의 책은 신경증과 예술에 대한 가셰의 관심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그림의 전경에는 유리잔 속에, 인물의 기울어짐과 비슷한 각도로 비스듬히 담겨 있는 꽃이 보인다. 보라색의 꽃망울들이 꽃대를 타고 조롱조롱 달려 있는 폭스글러브(foxglove). 5~7월 사이에 꽃을 피우니 그림이 그려진 시기(6)와도 일치한다. 꽃이 손가락에 끼우는 골무처럼 생겨 ‘foxglove’란 이름이 붙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초롱꽃을 닮았다.

이 식물의 학명은 디기탈리스(Digitalis purpurae)이다. 손가락을 의미하는 라틴어 디기투스(digitus)에서 나온 말이니 fo- xglove와도 무관하지 않다.‘ 디기탈리스’는 오늘날에 심장병 치료를 위해 사용하는 약의 이름이지만, 오래전부터 이 식물의 말린 잎은 뇌전증(간질; epilepsy)이나 결핵의 치료에 사용되어 왔었다(물론 효과는 없었겠지만…).

뇌전증 증상이 의심되었던 빈센트도 아마 가셰에게서 디기탈리스 치료를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로 본다면 디기탈리스 꽃은 화가 겸 환자인 고흐와 모델 겸 의사인 가셰의 딱 중간에 위치해 두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다시 모델에게 돌아가 보자. 가셰의 오른손을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에 닿은 부분이 손가락의 끝 두 마디인데, 보통 우리가 머리를 괼 때 사용하는 손 자세와 많이 다르다. 보통은 손목을 굽혀 손등이나 손바닥으로 괴던지, 아니면 손가락-손의 관절을 꺾어 손가락만으로 머리를 괴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그림처럼 손목 관절은 직각으로 젖힌 상태에서 손과 손가락이 만나는 관절(원위부수지간관절; DIP joint)은 직각으로 굽히고 손가락 끝 두 마디를 사용해 머리 무게를 감당한다면 얼굴에 깊은 패임이 남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몸을 같은 방향으로 상당히 기울였다면 모델로서는 무척 힘이 드는 자세가 된다(직접 한번 해 보시라!).

그래서인지 탁자 위에 반쯤 걸쳐진 왼손의 손가락들 마저 책상을 누르는 듯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왼쪽 팔꿈치도 공중에 들려 있는데, 이것은 왼 팔꿈치를 펴서 몸의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고흐는 왜 이렇게 모델에게 힘든 포즈를 강요하고 있을까? 혹시 가셰를 골탕 먹이려고? 물론 그럴리야… 하지만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환자인 고흐가 호감만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를 너무 의지해서는 안될 것 같아! 어쩌면 그는 나보다 더 중한 환자인지도 몰라…. (중략) 장님이 장님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는 도랑에 빠질 수 있겠지? …”

 

남달리 각별했던 고갱 [Paul Gauguin (1848~1903)]에게서 버림받은 충격 때문에 귀를 잘라버렸던 빈센트, 덕분에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환자가 보기에도 가셰 의사는 정상인이 아니었다는 말일까?

당시 가셰는 일 년 전 아내를 여의었고, 그 때문에 우울증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빈센트가 남긴 다른 두 장의 그림(그림 ④, ) 속에서도 가셰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빈센트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의사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7월에 마지막 작품 『까마귀가 날으는 밀밭』을 단 사흘 만에 완성한 후, 고흐는 그 밀밭에서 권총으로 배를 쏘았다. 하지만 즉사하지 못했고 가셰가 응급조치를 위해 불려 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셰는 그의 뱃속에 남은 총알을 빼내는 기본적인 치료조차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1890년대 상황으로 본다면 그 정도의 처치나 수술이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이틀이 지난 7 29, 37세의 고흐는 사랑하는 동생 테오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고흐의 표현에 의하면 ‘시대의 암울한 표정을 지닌 사람’ 가셰는, 고흐를 ‘예술 앞에 순교한 사람’이라는 말로 답했다.

 

이 그림은 고흐가 죽은 지 7년이 지나서 300프랑으로 팔렸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딱 100년이 되던 1990년에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와 당시로서는 예술품 경매 사상 최고 가격인 8,250만 달러에 낙찰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 소식에 가장 많이 놀란 사람들은 바로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 관계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같은 이름의 그림이 미술관에 멀쩡히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위작 논쟁에 휘말리다

 

그렇다면 미술관에 걸린 것과 경매장에 걸린 것 둘 중 하나는 가짜라는 것인가? 경매를 계기로 어느 그림이 모조품인가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배경을 감싸는 푸른 색조, 가셰의 표정이나 낯빛, 테이블에 있는 식물 디기탈리스를 담은 유리잔의 유무, 노란 책의 유무 등이 그림의 감별점이 되었지만, 이 두 그림은 하나를 모조품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너무 달라서(!), 아예 다른 그림이라 부르는 것이 더 나을 지경이었다. 일단 한눈에 보아도 오르세 미술관의 그림은 너무 빈약해 보였다. 콧대 높은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이 좀 상했을 것이다.

반대로 경매장에 나온 그림은 모든 면에서 유리했다. 색조도 더 화사하고, 유리잔도 있고, 책 두 권도 있다. 한마디로 컨텐츠가 풍부했다. 결정적으로 테오에게 보낸 편지 속에 고흐는 그림 속에 “책 두 권이 있다”고 밝혔고, ‘두 권의 책이 없는 가셰의 초상’을 따로 그렸다는 언급은 그 어디를 찾아 보아도 없었다. 모든 정황은 오르세 미술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왜 오르세 미술관 측은 자신들이 소장한 그림을 진품이라 믿는 걸까?

오르세 측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은 가셰의 유족들이 1950년대에 국가에 기증한 소장품들 속에 있었다. 고흐에게 초상화를 의뢰한 가셰가 당연히 (진품)그림을 소장했을 것이고, 그것을 물려받은 가족들이 미술관에 기증한 것이니 당연히 의심할 바 없는 진품이 아니겠는가? 백번 양보해서 진품이 따로 있다면 왜 의뢰자인 가셰가 모조품을 갖고 있던 것일까?(『월간미술』1999 7월호)

혹자는 가셰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직접 따라 그린 것이라는 말도 있다. 가셰는 애호가 수준을 넘어 아마츄어 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빈센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따라 그렸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위작 논쟁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미 1987년에 사상 최고의 기록으로 일본 재벌에게 팔린 고흐의 『해바라기』 역시 위작이라는 소문이 퍼져 작품의 진위 논쟁이 뜨거웠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세간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이었을까? 오르세 미술관은 1999년에 가셰의 소장품들을 전시하기도 했다(A Friend of Cezan- ne and Van Gogh: Doctor Gachet (1828-1909); 30 Janua- ry - 26 April 1999; Paris, Galeries Nationales du Grand Palais). 모사본들과 나란히 전시해 진위 여부를 판단하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동시에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그림이 진품이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조사를 벌인 결과 둘 다 진품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책 없는’ 초상화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애호가들은 다소 칙칙해 보이는 이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책 있는’ 초상화는 현재 행방불명이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1990년에 사상 최고가로 그림을 구입한 사람은 역시 일본의 제지업자였다. 3년 후 자신이 ‘빈센트’라는 이름을 붙여 추진하던 골프장의 건설 공사를 위해 거액의 뇌물을 준 것이 밝혀져 3년 형을 받아 복역하였고, 199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림의 행방도 묘연하다. 그림이 그에게 들어간 것은 확실하지만 그에게서 그림을 물려받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다시 그림이 세상에 나와 경매에 붙여진다면 사상 최고가를 다시 갱신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이렇게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 ‘재림’을 갈망하게 만드는 그림이 또 있을까?

 

 

 

 

의사 가셰는 의사로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성공한 의사였을까? 성공이란 의미를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으로 본다면그는 절반쯤 성공한 의사다.

의학 역사에도, 의학 교과서에도, 그 흔한 의학 저널에는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지만 ‘시대의 암울한 얼굴’로, 고흐의 죽음을 방치했던 의사로,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비싼 ‘얼굴값’을 가진 이로 미술사에는 남아 있으니 말이다. 죽은 가셰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출처]디아트리트 VOL.13, N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