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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욱의 medical trivia

병원에 걸린 ‘십자’ 엠블렘의 기원

 

박 지 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

신경과 전문의

<메디컬 오디세이> 저자

한미수필문학상 수상(2006, 2007)

 

 

 

얼마 전 병원에 갔습니다.
대개의 병원들이 그렇듯 제가 간 병원에도 입구에는 병원을 상징하는 십자형(十字形) 로고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도 검색 포탈에도 모두 병원은 죄다 십자형 기호로 표시됩니다. 기독교 재단의 병원이라면 몰라도 병원이 죄다 십자형 로고를 사용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은 그 이유나 한번 알아 볼까 합니다.

 

 

 


 

 

 

 

 

 

 

 

 

 

이런 십자형 로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이것 아닐까요? 
      


무엇입니까? 적십자? 맞습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려면 ‘빨간 십자’일 테죠.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엠블렘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것 아냐? 하시겠지만 좀 다릅니다. 

 

 

 

 

좀 유명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스위스 사업가 앙리 뒤낭 Henri Dunant은 1859년에 통일전쟁이 한창이던 이탈리아의 솔페리노를 방문했는데, 그곳 전쟁터에서 4만5천명 이상의 군인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어 처참하게 버려져 있는 현장을 목격합니다. 제네바로 돌아온 그는 이때의 기억을 되살려 1862년에 <솔페리노의 회상>이란 책을 펴내는데 이 책에서 그는 두 가지의 제안을 합니다. 첫째는 전상자들을 구호하는 민간 자원봉사자 단체를 평화시에 만들 것, 둘째는 전시에 전상자들과 이들을 돕는 구급요원들을 각국에서 서로 보호하도록 합의할 것. 처음의 주장은 나중에 각국에서 만들어지는 자원봉사자 단체들의 기원이 됩니다. 지금 183개국에 퍼져 있는 이 단체가 바로 적십자 Red Cross이지요. 두 번째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192개 나라가 서명한 제네바 협정 Geneva Convention입니다.

 

1863년에 국제적십자위원회 International Committee of Red Cross (ICRC)의 기원이 되는 위원회가 결성되는데 여기에서 전상자 치료를 위한 군(軍) 의료시스템이면서 동시에 자원봉사 요원들임을 식별하게 하는 엠블렘을 정하게 됩니다. 이 엠블렘은 간단명료하면서도 어디서든 눈에 잘 띄어야 하는데 이렇게 채택된 것이 바로 빨간 십자 마크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것이었을까요?

 

뒤낭의 조국인 스위스가 마침 중립국가였고, 그 색을 뒤집으면 백색 바탕에 빨간 십자가 나오는데 마침 백기는 항복이나 협상을 상징해오던 터였기에 채택되었다고 합니다만 그 역사적인 근거는 불확실 하답니다. 하지만 적십자도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주장합니다. 원인이야 어떻든, 백기에다 붉은 십자만 그리면 완성되는 깃발이니 만들기도 쉽고 눈에도 잘 띠니 괜찮은 디자인입니다.  
      
하지만 스위스 국기 관련설을 강조하는 이유는 엠블렘이 어쩔 수 없는 십자, 즉 기독교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러시아와의 전쟁(1876~1878년) 중에 같은 목적으로 빨간 ‘초승달crescent’ 엠블렘을 사용합니다.
십자 엠블렘이 무슬림들에겐 거부감을 일으킨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십자군 원정을 당한 아픔이 있던 이슬람권 국가들은 그럴 수 있겠지요. 그래서 나중에 이 초승달도 엠블렘으로 채택됩니다(1929년). 더하여 기독교도, 이슬람도 아니어서 십자도 초승달도 거부하던 이스라엘은 유대인 영웅 ‘다윗의 별’을 엠블렘으로 사용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논란 끝에 마름모꼴의 ‘수정crystal’을 공식 엠블렘에 추가하여 사용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국제적십자의 엠블렘이 하나씩 추가되지요.
 

 

 

하지만 이스라엘의 민간 구호기구는 국내적으로는 Red Cross가 아니라 Magen David Adom (MDA)이며 엠블렘도 자신들이 원하던 다윗의 별을 사용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左).

 

 

 

자, 이제 이 세종교가 치열하게 부딪히는 팔레스타인이나 이스라엘에서 혹시 사고가 발생되면 어느 엠블렘이 보이는지 유심히 보십시오. 운이 좋으면 넷 다 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좀 혼란이 생깁니다. 적십자가 아니면 ‘빨간 십자’ 엠블렘을 사용할 수 없을까요? 다음의 사진을 보시면 우리의 눈에 익은 빨간 십자 엠블렘을 확인할 수 있지요.

 

 

군 의무대 앰뷸런스를 보세요. 물론 적십자 소속도 아닌데 사용하고 있네요. 빨간 십자 엠블렘은 법으로 아래의 네 가지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1. 전상자의 치료시설
2. 군대의 의료 인력이나 장비
3. 군목이나 종군 사제
4.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나 그 산하 185개 회원국의 적십자; 이 경우에는 소속을
   식별할 수 있는 텍스트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저 구급차는 (2)항에 해당하겠지요.

 

 

이건 어느 경우에 해당할까요? 이 군복은 한국전쟁 기간에 부산에 있던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 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의 여성 근무자 유니폼입니다. 이들은 자원을 한 민간인들이어서 군인은 아닙니다. 그래서 모자와 옷깃에 계급장 대신에 아무런 표식이 없는 빨간 십자 엠블렘을 달았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야전병원에서 전상자 구호활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전시에 이 엠블렘은 “나는 의생병medic이고, 비무장non-armed이므로 사격하지 마시오do not shot!”라는 메시지를 상대측에 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1)항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위의 것들은 (4)항에 해당됩니다. 각국의 적십자나 연맹과 관련된 시설은 반드시 해당 적십자를 식별하도록 표기합니다.

 

어떤 병원 원장님이 개원할 때 빨간 십자 엠블렘을 사용하려다 혼이 났다는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왜 그랬는지 물었더니 눈에 잘 띄고, 아픈 사람이 한눈에 알아보라고 그랬답니다. 맞는 말씀이네요. 그러라고 만든 엠블렘이니 말이지요. 그런데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병원에서는 대부분 녹색 십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왜 그럴까요? 적십자를 사용하지 못하니 대신 궁여지책으로 짝퉁격인 녹색 십자를 사용할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11~13세기에 있었던 십자군 원정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아실 겁니다. 12세기에 십자군들의 점령지 예루살렘에 나병환자들을 구호하기 위한 병원이 세워집니다. 이 병원은 ‘성 라자로 교단 Millitary and Hospitaller Order of St. Lazarus’이 세워서 운영하였는데 그들이 사용한 엠블렘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나사로)를 살려낸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지요.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어느새 녹색 십자는 의료 health care나 목숨을 구하는 일 First Aid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한참 뒤에는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 아예 구급의 상징으로 정합니다. 
      
하지만 이 엠블렘도 전 세계에서 다 통용될까요? 빨간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십자가가 부담스러운 이슬람권에서는 아마 아닐 듯합니다. 몇 개의 회교권 병원들을 검색해보니 십자대신에 빨갛거나 녹색인 초승달 엠블렘이 많이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늘상 만나는 아주 하찮은 엠블렘은 글자 그대로 일종의 상징체계에 속합니다. 하지만 상징이 의미하는 내용을 모른다면 상징이 아니라 그냥 그림일 뿐이지요. 더더구나 그 상징을 애용하는 이들이 그렇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오늘부터는 병원 문지방에 걸린 십자 엠블렘이 허투루 보이진 않을 겁니다.